말과 생각이 종이로 옮겨지면

“나... 구속된대.”

어느 날,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황당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낌이 전해졌다.

직감적으로 보이스피싱이 떠올랐다.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알게 됐다.

친구는 ‘검찰청 ○○ 검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 자는 친구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되었다며

공범으로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이어 국무총리, 검찰총장, 대법원장의 서명이 찍힌

‘구속영장’ 사진이 전송되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법률용어로 가득 찬 문서였다.

글자체는 단단했고,

붉은색 직인까지 찍혀 있었다.

친구는 그 문서 앞에서 얼어붙었다.

‘이게 진짜일까?’

그 한 장의 종이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다행히 친구는 내 설명을 듣고 안정을 되찾았고,

결국 보이스피싱임을 깨닫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때 다시 생각했다.

활자라는 옷을 입는 순간,

사람들은 말의 진위를 의심하기를 멈춘다.




어떤 말이나 생각도,

종이 위에 적히는 순간 묘하게 무게가 생긴다.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말조차도

괜찮은 책 표지를 두르고

세련된 서체로 인쇄되어 있으면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듯 보이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처럼 느껴진다.




생각과 말은 종이의 질감과 활자라는 옷을 입는 순간

마법 같은 권위를 갖게 된다.

판결문도 마찬가지다.

종이는 보통 복사지보다 조금 두껍고,

은은한 노란빛을 띤다.

맨 위에는 법원 마크가,

그 아래에는 ‘○○○법원’ ‘대법원’이라는 이름이

단단한 고딕체로 인쇄되어 있다.

판결문 말미에는 판사의 서명과 날인이 찍혀 있다.

“판사의 이름을 걸고 내린 판단이다.”

그 선언 속에서 글자 하나하나에 무게감이 느껴진다.





살면서 처음 판결문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특별히 강한 저항 의식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종이의 권위 앞에서 주눅이 든다.

판결문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같다.

판사의 판단이 그 멋진 갑옷을 두르고 있으니

일견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변호사는 그 갑옷에 눈이 멀면 안 된다.

진짜 찾아야 할 것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알맹이’다.

판사가 잘못 전제한 사실은 없는지,

사실에서 결론으로 건너가는 논리의 다리가

어디에서 끊어지는지 찾아야 한다.



그래서 변호사는

점자를 읽듯 판결문의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더듬는다.

논리의 흐름이 갑자기 도약하지 않는지,

무엇을 전제하고 어떻게 결론에 이르렀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읽는다.

완벽해 보이는 것에 속지 않고,

빈 곳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이다.

어쩌면 모든 글을 읽는 일이 그렇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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