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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렌스 Feb 12. 2019

애통하는 자

마태복음 5장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개역개정)

'애통하는 자'란 어떤 의미일까? 무엇으로 인해 애통한다는 것일까? 너무 정보가 부족하다. 영문 버전을 보자. 


“You’re blessed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메시지 성경)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메시지 성경에서 '애통'의 마음을 잘 서술해 놓았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느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솔직한 대답은 나의 생각을 지금 이 순간 가장 많이 사로잡고 있는 것일 것이다. 

어떤 책에서 '우상(Idol)'의 정의는 '지금 나의 생각을 가장 많이 사로잡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보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고 입으로 말하면서도 하루 종일 나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회사 일이라면 사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회사에서의 성공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닌 것들로 나의 생각을 채우고 있다면 사실 그게 나의 실제적인 '신'인 셈이다. 

예전 학교 선생님들 말씀에 당구에 빠지 학생은 학교에서 칠판을 봐도 당구대로 보이고, 친구들의 뒷모습을 봐도 당구공으로 보인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친구들을 만나도 머릿속은 그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것(what is most dear to you)이 돈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다른 사람의 인정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일 것이다. 결국 모든 우상의 끝은 욕심과 교만과 두려움으로 귀결된다. 


팀하스의 하형록 회장님은 Favor라는 저서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3초 만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요?” … 하 회장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주 간단합니다. 제가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희생이 없으면 착한 일에 불과해요. 그냥 착한 일은 보통 사람이 다 하는 거예요. 희생이 있어야 감동을 줘요. 착한 일은 눈물이 안 나요. 희생해야 눈물이 나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있다. 놓지 못하고, 그것으로 부터 자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 그것을 놓으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너의 돈을 포기하라고 하고, 너의 명예를 포기하라고 하고, 너의 자존심을 포기하라고 하고, 너의 소유욕을 포기하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 


그때 너무나 아프다. 나의 우상을 나에게서 뜯어내는 일은 마치 살점이 함께 뜯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한 희생을 감수했을 때. 자기만의 십자가를 졌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좀 건조하다. 메시지 성경은 좀 더 절절하게 번역을 해 주었다.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네가 남을 위해 희생의 아픔을 감수했을, 바로 애통하는 그때에야 너를 가장 사랑하시는 '그분'이 너를 힘껏 안아주실 것이다. 


하형록 회장님의 삶의 고백처럼. 진정한 희생을 한자는 애통하게 되어 있다. 그 희생과 포기가 너무 아픈 까닭이다. 하지만 그 희생을 통한 애통함 자체가 바로 마태복음 5장의 두 번째 축복이다. 

그 십자가의 아픔을 통해서만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구원의 단계를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두 번째 축복의 말씀을 통해 희생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으로 가는 두 번째 열쇠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에 대한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일이 나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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