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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변호사 Sep 15. 2021

성폭력 피해자로 증인신문 대비하기

성폭력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서 받는 조사보다 <증인신문>을 더 힘들어합니다. 아무래도 공개된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부터 부담일 텐데요. 범행을 부인하는 피고인(가해자)의 변호인(이하 '변호인'이라고 함)은 증인신문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깨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과의 모순점을 찾기 위한 공격적인 질문은 또 다른 2차 피해를 가져오기도 하죠.


직접 피해의 당사자라고 해도 상대방의 질문에 답을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답을 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한 대답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부정될까 봐 염려하는 것일 테지요. 그러나, 증인신문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자리이니만큼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았으면 합니다.


증인신문을 완벽하게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현장에서 바로바로 묻고 답하는 절차이기 때문이죠. 다만, 진술을 할 때 몇 가지만 주의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기억나는 대로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추측해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법원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기준은 구체적이고 모순 없이 일관되게 진술했느냐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을 하기가 힘들겠죠. 이런 이유로 법원은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진술 자체를 증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수사기관에서 했던 진술 그대로, 경험한 사실을 가감 없이 진술하시기 바랍니다.



증인신문은 증인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피고인의 변호인들 중에는 가끔 증인신문의 범주에서 벗어난 질문을 하곤 합니다.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죠.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되겠죠. 예를 들어, "증인은 피고인이 증인을 만졌을 때 가만히 있었지요?" 또는 "증인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을 만지면 저항하는 게 일반적인 생각인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은 적합하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견을 묻는 질문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가능하겠지만(형사소송규칙 제74조 제2항), 위와 같은 질문은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재판부에 제지를 촉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사소송규칙
제74조(증인신문의 방법) ① 재판장은 증인신문을 행함에 있어서 증명할 사항에 관하여 가능한 한 증인으로 하여금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진술하게 하여야 한다. 
② 다음 각호의 1에 규정한 신문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다만, 제2호 내지 제4호의 신문에 관하여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2.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3.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4.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



질문에 대해 전부 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건과 관련되지 않고 모욕적인 질문이라면 굳이 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판부에 꼭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언급을 하면 됩니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한 변호사가 있다면 이런 부분을 도와줄 겁니다. 사건과 관련되고 필요한 질문이라면 다소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거부하기보다는 제대로 답을 하는 게 좋습니다. 내가 한 대답이 수사기관에서의 진술과 일관되고 모순되지 않다면 진술 자체의 신빙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 사건과 관련 없는 신문 예시

1) 피해자의 성적 취향

2)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 유무

3)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사생활에 관한 신문

4) 모욕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신문

5) 정당한 이유 없이 의견이나 생각을 묻는 신문



증인신문사항을 미리 받아 볼 수 없을까


증인신문은 '주신문 → 반대신문 → 재주신문'처럼 번갈아가면서 합니다. 이런 방식을 교호신문방식이라고 하는데요. 증인신문을 신청한 당사자가 하는 신문을 '주신문'이라고 하고, 상대방의 신문을 '반대신문'이라고 합니다. 즉, 검사가 증인을 신청했다면 검사가 주신문을 하고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합니다.


증인신문을 하는 이유는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면서 피해자가 그동안 수사기관에서 했던 진술을 증거로 사용하는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진술을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 검사가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것이죠.


증인신문사항은 검사나 변호인이 증인에게 질문할 사항을 미리 적은 목록입니다. 주신문을 하는 검사가 증인에게 질문할 사항을 적은 것은 <증인신문사항>이고, 반대신문을 하는 변호인이 증인에게 질문할 사항을 적은 것은 <반대신문사항>이 되죠.


그렇다면 검사가 신청한 증인에 대한 증인신문사항이나 변호인의 반대신문사항을 미리 받아 볼 수는 없을까요? 검사와 변호인은 증인신문 당일, 증인신문사항(반대신문사항 포함)을 재판부와 상대방에게 제출하고 바로 증인신문이 진행됩니다. 


실무상 피해자나 피해자 변호사는 증인신문 당일에도 증인신문사항을 받아보기 어렵습니다. 신문 내용을 듣고 즉석에서 불필요하거나 2차 피해를 유발하는 질문은 제지를 촉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검사가 피해자인 증인에게 물어볼 질문은 그동안 수사기관에서 받았던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은 내용인 <진술조서>를 한 번 정도 읽어보고 증인신문에 임하는 게 좋습니다.


※ 민사소송과의 차이점

참고로 민사소송은 증인을 신청한 당사자가 증인신문사항을 증인신문기일(재판) 전에 미리 제출해야 합니다. 상대방은 증인신문사항이 미리 제출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증인신문기일을 연기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할 수 있죠. 증인신문사항을 알지 못한 채 반대신문을 준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재판부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하시기 바랍니다.


증인신문을 모두 끝마친 후에 재판부에서 증인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증인신문은 피해자가 법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재판을 맡은 판사에게 꼭 하고 싶은 말,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편하게 하세요. 너무 길어지면 재판이 지연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전달하고픈 말을 명료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면 별도로 탄원서를 제출하는 게 좋고요.


피해자가 피해를 말한다는 것, 즉 가해행위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가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결과가 어떠한지, 그러한 피해가 회복되기 위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에 관해 '피해자 자신이 자기 입을 열어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는 것'. 이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복합적 의미를 가지는데,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피해자 자신이 그 내부에서 피해로부터 해방되며 피해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즉, 피해자 자신이 내적으로 피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럼으로써 그 상처와 고통이 치유되는 큰 의미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수희, 처벌 뒤에 남는 것들 中 



증인신문 이후에 할 일, 증인신문조서 열람·등사 청구


증인신문을 한 내용은 <증인신문조서>라는 형태의 기록으로 남습니다. 재판부에 열람·등사를 청구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재판부에서는 허가해 줍니다. 내용을 살펴보고 잘못 기재된 부분이 없는지, 증인신문 당시 하지 못한 말이 있거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이에 대해 재판부에 의견을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변호사가 있다면 변호사를 통해서, 그렇지 않다면 탄원서나 진술서의 형태로 제출하면 됩니다.




증인신문은 피해자의 진술을 증거로 사용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입니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많은 준비는 오히려 기계적이고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니 기본적인 사항만 준비하면 됩니다.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동안 수사기관에서 진술했던 내용대로 차분히 대응하시기 바랍니다.



▼ 증인신문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세요.

https://brunch.co.kr/@lawyer4u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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