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맡았던 첫 이혼사건은 유책 배우자를 대리한 것입니다. 유책 배우자는 이혼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를 말하는데요. 배우자를 때린 사람, 바람피운 사람 등등. 유책 배우자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 제가 맡은 사건은 소위 말하는 바람피운 남편 사건이었어요.
상간녀와 밀담을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 사진 등 의뢰인이 바람피운 증거는 차고 넘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인은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본인의 대리인인 저한테 조차도요.
그냥 아는 여자예요.
제가 의뢰인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그냥 아는 여자.
그냥 아는 사이는 어떤 사이인가. 저는 그냥 아는 여자의 정의가 무엇인지 가늠해봤습니다. 상대방이 증거로 제출한 의뢰인과 상간녀 사이의 농도 짙은 대화 내용과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보다 그럴싸한 표현을 찾고 고민하는 저를 보며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럼 사건을 맡지 말던가, 의뢰인에게 따져 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겁니다. 저도 그러면 좋았겠지만, 당시 저는 마음대로 사건을 선택할 수 없는 고용된 변호사였어요. 제 의지대로 맡은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게 주어진 사건이니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하고 싶었습니다.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을 쓰기 위해서는 의뢰인에게 사실관계도 물어봐야 하고, 필요한 증거도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 변호사와 의뢰인은 협업관계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제 물음에 의뢰인은 시종일관 아는 여자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아내가 외롭게 해서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정도의 변명도 그분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니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더 이상 의뢰인과의 진정한 소통은 힘들어 보였고, 어떻게든 잘 포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판사님의 질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판사 : 피고 측 대리인, 유책 배우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시네요?
나 : 네
판사 : 아니 대리인, 카톡 메시지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아니라고요?
나 : 네,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판사 : (피식 웃음)
제 입에서 '그냥 아는 사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이 된 것처럼. 유책 배우자임에도 유책 배우자라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바람피우고 잘못한 게 아닌데도 부끄러웠습니다.
처음부터 이 사건을 맡았다면, 의뢰인에게 이런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의뢰인이 하자는 대로 앵무새처럼 말하는 변호사를 원한다면 굳이 변호사를 찾아올 이유가 없어요. 가끔 변호사를 대필가로 착각하는 의뢰인도 있습니다. 의뢰인의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 적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적어도 변호사라면, 의뢰인이 처한 상황에서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뢰인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이게 제가 첫 이혼사건을 경험하며 깨달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