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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 18. 2023

손(님) 많은 날


유독 손님이 많은 날이 있다. 우리 사무실은 예약 손님 말고도 워크인 손님들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들, 기자들, 택배기사님들, 활동가분들, 길을 잘못 찾은 분들, 그리고 예전 의뢰인들까지, 다채롭다. 어떤 날은 쉼 없이 전화가 울린다. 공교롭게도 무거운 이야기들이 담긴 상담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날이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에너지를 빼앗기곤 한다. 반면, 신기할 정도로 사무실이 조용한 날들도 있다. 지하철역 근처, 대로변 3층에 있으니 바깥 소음은 들려오지만, 전화 한 통 약속 하나 없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자면 꽤나 안락하다.



나는 출근해서 바로 일을 시작하진 못하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빠르게 집중하고 진도를 빼는 편이다. 해야 하는 일들을 쭉 리스트업 하고, 그중에 많은 집중과 부담을 요하는 서면들은 내내 머릿속으로 구상하다가, 한잔 물이 꽉 차듯 결심이 차는 순간부터 쓰기 시작한다. 그분이 오신 듯.


그제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10시 출근 후 책상 앞에 앉자마자, 바로 서면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더 이상 생각만 하며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의뢰인을 생각해서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했으며, 자료가 다 준비되었으니 미룰 이유가 없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던 사건이었다.


안될걸 알면서 하는 싸움. 내 머릿속으로는 너무 당연한데 제도적으로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을, 완고한 공무원에게 설명하는 일. 근거법령을 나열하고 의뢰인의 사정을 늘어놓아보지만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타가 오는 순간. 의뢰인의 안타까운 사정과,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만 믿는다며 손을 모으는 그들을 생각하며 느끼는 부담감, 서류를 들여다볼수록 복잡해지는 머릿속…. 그런 순간들이 얹힌 듯이 쌓이다 보면, 스트레스에 눈물이 터지기도 한다.


골머리를 앓으며 서면을 쓰고 앉아있는데 딸랑, 사무실 현관문 종소리가 울렸다. 예전 의뢰인 유학생 H다.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기에 점심을 사주겠다고 한 게 며칠 전 일이었다. 그녀는 데이트 폭력 피해로 8개월째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자살을 하겠다며 밤에 갑자기 울면서 전화를 해 나를 놀라게 하던 이가,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챙기지 않아 20kg가 빠졌던 이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추어탕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일도 하고 약도 잘 먹고, 밥도 잘 먹어 살이 좀 쪘다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눈시울이 붉어지며 들었다. 그이의 밝은 모습에 감사하고 안도하고, 어렵게 되찾은 그의 일상을 함께 축하하며 점심식사를 했다.


그는 나를 보며, 언니, 언니도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까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언니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요.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이렇게 대답했다. H가 좋은 사람이라서, 내 말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줄 수 있었던 거예요. 내가 당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적이 있어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당신도, 우리와 같은 누군가를 이해하며 보듬어주길 바라요…


헤어질 무렵 내가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그가 건넨 선물에는, 곱게 포장된 향수와 같이 그의 고마움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오후 4시에는 S가 잠시 들른다고 했었다.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해고로 진정을 넣고 화해권고결정과 보상금을 받아내 준, 역시 나의 예전 의뢰인이다. 꼼꼼하고 똑똑한 본인 성격 덕분에 그 누구보다 쉽게 일할 수 있었던 사건. 할 말이 있다며 보자기에 또 무슨 일인가 걱정하며 맞이했는데, 대뜸 상품권을 건네며 사무실 사람들과 맛있는 거 사드시라며, 새로 옮긴 직장이 바빠 약속했던 빵은 구워오지 못했다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바쁘게 사무실을 나서는 이. 서둘러 인사를 나누고 배웅하며 돌아서는데, 기분이 묘하다.



어떻게들 알고 찾아온 걸까. 유난히 힘든 날, 부질없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 날, 머리가 아득해지고 눈물이 고이는 날, 선물을 들고 찾아온 요정들. 내 의뢰인들. 나는 복이 많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내가 운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고마운 마음과 응원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높은 월급이나 번쩍번쩍한 사무실이 아니라 이런 순간들이 나를 일하게 한다는 것,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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