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오대산 적멸보궁(사후세계가 있습니까?)
오대산을 처음 간 때가 1997년 여름이었다. 혜정스님이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하안거를 나고 있었다. 청량선원이라 이름한 이유가 있다. 오대산이 청량('淸凉)하기 때문이다. 여름 낮 온도가 40도가 올라가도 낮잠을 자면서 이불을 덮고 잤을 정도로 시원한 기운이 가득찬 곳이다. 오대산은 월정사를 지나 8km를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상원사가 나온다. 지금은 선재길이라 해서 옛길을 복원해서 걷고 싶은 길로 단장을 잘해 놨다. 상원사에는 청량선원이라는 선방이 있고, 세조와 문수동자에 대한 일화로 유명한 곳이다. 몸에 난 종기를 치료하고자 계곡에서 몸을 씻고 있던 중 지나가는 동자승에게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줬다는 말은 하지마라”고 말하자 동자승은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봤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한 후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세조는 종기가 씻은 듯이 낫자 기억을 더듬어 화공으로 하여금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이를 나무로 조각하여 상원사 법당(문수전)에 모셨다.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이다.
다음 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가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려 하자 고양이가 나타나 옷소매를 물고 못 들어가게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는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게 하자 탁자 밑에 자객이 숨어있었다. 고양이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한 세조는 ‘고양이 밭’이라는 묘전을 내리고 한 쌍의 고양이 묘상을 문수전 계단 앞에 안치하였다. 한양에서도 아주 먼 심심산골에 세조가 왜 상원사 불사를 하였을까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 나중에 오대산 선방 수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신미대사와 세조와의 인연때문이었다. 신미대사는 한글창제의 큰 공이 있었지만 당시 조선시대 숭불정책때문에 이름이 묻혔다고 한다. 세조는 신미대사의 인격을 흠모하여 그가 내려가 있던 속리산 법주사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다. 정2품송이 바로 세조가 그 나무 아래에서 쉬었기 때문에 벼슬이 내려진 것이다. “신미대사같이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걸어갔다.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다.”라면서 이숭녕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를 평가하였다(출처: 법보신문). 신미대사는 세종때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라 추정될 뿐만 아니라 세조때에도 석보상절 등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등 “신미대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세상사람들은 훈민정음 창제하면 집현전 학사들만 떠오르지만 역사 속에는 실상 길을 닦은 이는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세종이 임종 몇단 전에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가 아닌 윗사람으로 예를 갖추었다고 하니 세조가 그가 있던 속리산 법주사 암자인 복천암으로 그를 만나러 갈만도 하였다. 신미대사는 세조에게 오대산 상원사가 다 쓰러져가니 불사를 하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고, 세조는 그의 말대로 상원사 불사를 하였던 것이다. 왕이 되고자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때문에 그 업을 녹이고자 불교에 의지했던 세조였다.
상원사를 지나 산길을 30분쯤 오르다 보면 중대 사자암이 나온다. 그곳에서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하루에 4번씩 적멸보궁으로 올라 다니면서 기도를 하였다. 새벽 3시가 되면 문밖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방에 있는 사람들도 한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랜턴을 들고 다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마다 다 사연과 소원을 가지고 꼭두새벽에 법당을 향해 올라갔다. 평범한 곳이라면 사람들이 이정도 몰려들지 않을 것이다. 워낙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라 전국각지에서 여러 사연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법당 안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다. 대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적멸보궁이기 때문이다. 법당 뒤쪽에 사리탑을 봉안하는데 오대산은 탑이 없다. 그래서 정확히 진신사리를 어디다 모셔놨는지는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오대산 적멸보궁과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이다. 신라의 자장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오대산 적멸보궁은 조선시대 때 이름을 날린 박문수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다. 박문수는 승려들에 대하여 놀고먹는 사람들이라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그가 어사로 전국을 다니면서 오대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다. 그가 비로봉 정상에서 산의 기운을 한번 훝어보더니 오대산의 모든 정기가 적멸보궁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저러니 빌어먹고 살아도 되는 구나’
적멸보궁과 사람들이 묵고 있는 중대와는 시간상으로 30분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하루에 4번씩 기도를 하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충분히 되었다. 오히려 힘들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밥은 한두 가지 정도의 나물에 비벼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쉬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그나마 불사가 이루어져 예전보다 숙식이 좋아졌다. 당시는 먹는 게 너무 부실해서 상원사까지 내려와 선방 스님들이 공양하고 난 후에 점심 공양을 얻어먹었다. 선방은 공양이 잘 나오기 때문이다. 혜정스님이 공양을 챙겨줬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중대까지 올라가다 보면 금방 배가 꺼졌다. 절 음식이 아무리 좋아봐야 금방 배가 고파진다. 그래도 그때는 34살 젊은 청춘이기 때문에 산을 타도 지치지가 않았다. 상원사 선방 스님 중 한분은 아침 공양을 들고나면 항상 오대산 비로봉까지 달음박질로 다녀오곤 하였는데, 그분은 중대를 거쳐가면서 나를 불러 같이 가자고 하였다. 한 두번 그 스님과 아침마다 뜀박질로 비로봉을 올라가봤는데 경사만 엄청 급할 뿐 막상 올라가면 별 볼 것도 없었다. 그 스님은 조계종단에서도 알아주는 등산 잘하는 스님이었다. 그러나 선방 수좌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뛰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가볍게 산책을 해야지 뛰는 것은 안 좋다는 것이다. 기운이 분산되어 그걸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걸리니 좌선하는 데 장애가 많다고 하였다. 몇 년 전 그 스님의 안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산을 날라다닐 정도로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왜 병으로 죽냐고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의아했다. 사람의 명은 확실히 체력과 상관없다는 것을 절집에서 많이 느꼈다. 수행자는 수행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항상 느낀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
음율에 맞춰 사람들과 같이 따라하다 보면 법당 안으로 신선한 기운이 벽에 부딪쳐 내 몸으로 전달된다.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새벽바람이 가슴을 통과할 정도로 시원해진다.
당시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입승을 보던 50대 중후반의 수좌 한분은 점심공양을 마치면 적멸보궁에 참배하러 올라오셨다. 며칠만에 낯이 익자 스님에게 물었다.
“사후세계가 있습니까?”
당시 나의 화두는 죽음이었다. 죽은 뒤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내 눈으로 직접 훤히 보고 싶었다. 이해는 되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스님이 말씀을 해줬지만 마찬가지였다. 글로 익히 들은 이야기였다. 죽어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구나 생각들었다. 몇 년 전에 오대산 적멸보궁을 스님 두 분과 갔을 때 그 스님이 생각나 안부를 물어봤다. 근데 그 스님도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이로 보면 지금 60대 밖에 안 되실 건데 그 스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나와 사후세계를 이야기 했던 그 해 하안거를 마치고 지리산으로 중고차를 사서 몰고 올라가다가 운전미숙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순간 싸했다.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업의 무게만 있지 몸무게가 있는 게 아니라는 청화스님의 법문이 있다. 자작자수(自作自受)다. 인연법 아닌 게 없다는 의미도 느낀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지'라는 식으로 세상을 살았던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죽으면 끝이 아니겠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글을 써본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글이 술술 풀렸다. 사람의 심정이 동일하다는 것을 느꼈다. 죽음에 직면하면 모두가 동일한 이치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러니 옛 어른들의 말씀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