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문경 봉암사
1998년 사법연수원 2년차 가을쯤 문경 봉암사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우리나라 절 중에서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몇몇 절의 하나이다. 그때도 일반인은 나와 법당에 옻칠하러 온 장인 이렇게 두 명뿐 이었다. 될 수 있으면 스님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일반인들을 보는 게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옻칠 장인은 저녁마다 내 방으로 건너와서 옻칠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을 벌면 조상 선산을 돌보고, 일본사람들은 돈을 벌면 집을 옻칠한다고 하였다. 옻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면서 나무젓가락으로 살짝 찍어 흐르는 한 방울이 하루 적당량이라고 하였다. 일주일동안 있게 해준 현도스님에게 감사할 뿐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절 살림을 보는 원주스님이 그만 가 달라고 해서 딱 일주일만 있었을 정도로 사람들이 오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곳이다.
봉암사는 1년 내내 산문을 폐쇄하여 석가탄신일에만 유일하게 개방하기 때문에 수행정진을 하는 선방 수좌들의 요람이다. 1982년 이래 조계종 특별선원으로 지정되면서 절 문을 닫았다. 일반인이 못 들어가는 전설 같은 이유를 어느 스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지역주민들이 절 주변을 관광지화 하려고 했었는데 스님들이 반대하자 주먹들을 앞세워 절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스님들과 주먹들이 절 앞에서 대치하였고, 곧 일대 접전이 벌어질 참이었는데 화엄사 출신 스님 한 사람이 땅바닥에 낫을 찍어놓고 두목에게 말하기를 “이 낫을 먼저 집는 사람이 상대방 목을 치기로 하자. 그리고 지는 쪽은 군소리 없이 물러가기로 하자”라고 했다한다. 처자식이 없고 ‘이 생 한번 없는 셈 치지’ 하는 스님하고 처자식을 먹어 살려야 하고 이 생에서 잘살고 싶은 주먹하고 과연 누가 이길까? 그 말에 결국 주먹들이 겁을 먹고 물러간 뒤로는 일반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말을 화엄사에 있을 때 봉암사 스님으로부터 들었다. 스님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 스님은 화엄사 출신 스님들이 그만큼 기운이 강하다는 것을 말하고자하였다. 실상 스님들을 만나보면 그 분의 말이 틀리지 않다. 화엄사는 지리산이라는 영산을 가지고 있다. 구례읍에 들어서면 벌써 공기냄새가 다르다. 또 화엄사계곡은 폭도 넓고 바위들도 큼직큼직할 뿐만 아니라 물소리도 엄청 크다. 화엄사에서 하룻밤이라도 자보면 실감을 할 수 있다. 계곡물 소리는 새벽이면 더 크게 들린다. 졸졸졸 실개천소리가 아니라 폭포소리같이 쾅쾅 쏟아지는 소리다. 아무리 유약한 사람이라도 그런 소리를 몇 년 동안 들으면서 살다보면 기질이 저절로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화엄사에 있는 건물이나 석탑들은 전부 크고 무게가 있어 보인다. 그것을 정확히 느끼려면 동이 틀 무렵 어둠이 막 사라질 즈음에 화엄사 경내에 앉아 있어보면 된다. 그 시간이 되면 어둠속에서 건물들의 윤곽이 살포시 드러난다. 그 순간 건물들이나 석탑들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 보는 절은 눈으로만 슬쩍 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진짜 절을 구경하려면 하룻밤 자봐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간혹 물어보는 게 있다. ‘절에서 어떻게 잘 수 있느냐고’. 뭐라 딱히 말할게 없다. 아는 스님이 있으면 좋다고 밖에. 조계종단의 절들은 조계종 승려들이면 아무나 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운수납자처럼 만행을 하다가 발길 닿는 절에서 유숙을 할 수 있다. 절이 어떤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 보다 오히려 스님들이 다른 절을 가지 못한다는 말을 아는 스님으로부터 들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우리들이 아는 스님 절이 있으면 한번 보러갈 수 있지만 스님들은 구경삼아 이 절 저 절 갈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집안이 아니면 다른 집안 찾아 가는 게 쉽지 않듯이 절도 문중들이 있다 보니 같은 문중이 아니면 다른 문중 절에 가서 객으로 머무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나이 먹은 노스님들은 더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노스님들이 별로 없다. 조계종단의 스님들이 만 명이라면 결국 그 만 명이 언젠가는 나이를 먹을 것이다. 나이 들면 서럽다는 게 젊은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못 받기 때문이다. 기력도 없어 하는 일이 없으면 더 그렇다. 세상이치가 승속이 구별된다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젊을 때야 도 닦는다고 길에서 죽어도 좋다고 열심히 하지만 그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보니 나이가 들면 덜컥 겁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앞날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사람이라면 떨쳐버릴 수 없는 본능이다. 그 본능을 거슬러 가는 게 수행인데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내 집을 마련하는 게 좋다는 식으로 자기 절을 가지려 한다.
요즘은 가는 절마다 불사를 안 하는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선다. 고즈넉하고 아담한 절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천 선암사가 고풍스러운 이유는 단청이 벗겨져도 돈이 없어 단청을 새로 입히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오히려 관광자원이 된 것이다. 고풍스러운 절이 그립다. 오솔길을 따라 한참동안 걸어야 비로소 닿는 절이 그립다. 요즘에야 스님들의 위상이 성직자의 대우를 받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지 못했다. 성직자의 특성은 훈육이라고 한다. 항상 상대방을 학생으로 생각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좋은 말을 앵무새처럼 한다는 신문칼럼을 읽은 기억이 난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나라 절은 아픈 역사가 있다. 조선시대 승려는 칠반천인 중 가장 끄트머리에 해당되는 천민이었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의미 속에 그 역사가 담겨있다. 이판(理判)은 선승을 말하고 사판(事判)은 소임을 보면서 절살림을 하는 스님을 말한다. 따라서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그렇게 쓰여지는 게 아니라 막다른 곳까지 가서 더 이상 물러날 데도 없다는 의미로 변질되어 사용되었다. 천민 중의 천민이 되었는데 더 이상 못될 게 뭐가 있느냐.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하는 식이다. 승려를 비꼬는 ‘땡초’라는 단어도 원래는 ‘당취’라는 비밀결사에서 변질된 말이라고 한다.
봉암사는 폐쇄산문이기 때문에 관광지가 아니다. 어떠한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지 않다. 다른 산문들처럼 일주문까지 식당들이 즐비한 그런 곳이 아니다. 더구나 희양산 일대의 사찰림은 국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일체의 개발행위는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봉암사 경내로 들어서서 계곡을 따라 산책을 해보면 계곡물이 그렇게 맑을 수 없다. 그리고 편편한 바위가 많은데 어떤 바위는 그 위에서 족구를 해도 될 정도로 넓어보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암자가 있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 끝에 있는 조그만 암자 하나와 봉암사에서 희양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에 있는 암자다. 그 암자는 커다란 바위굴 앞을 흙으로 메워서 사람 한사람 기거할 정도로 만들어놓은 토굴이다. 그런 암자에 기거하면 없는 신심도 절로 날정도로 수행의 기운이 느껴졌다. 산길을 따라 희양산을 올라가다 보면 바위를 뚫고 생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소나무가 걸작이다. 하늘을 향해 뻗은 게 아니라 수평으로 꼬면서 생장하였다. 서양의 소나무와 동양의 소나무가 차이나는 전형적인 예이다.
봉암사 태고선원은 전국의 선방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80명~100명의 수좌들이 안거를 할 수 있다. 이 곳 선방은 여러 부류가 있다. 하루 8시간을 수행하든지 10시간을 하든지 14시간을 하든지 선택하게끔 되어있다. 8시간은 보통정진이고 10시간은 가행정진이고 14시간 이상은 용맹정진으로 이름 붙일 수 있다. 용맹정진은 보통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공부든 뭐든 체력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건강이 중요하다. 공부도 젊었을 때 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회향하기 전 일주일 철야정진을 하는 것은 수행의 힘이 쌓여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선방은 구참스님과 신참스님으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각기 소임이 정해져 있다. 안거를 들어가기 전에 방부를 짠다는 말이 소임을 각기 지정한다는 말이다. 구참스님은 방문이 있는 쪽으로 앉고 신참스님은 문이 없는 벽쪽으로 앉는다. 선방에는 입승(立繩)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학급의 반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입승은 법람이 25년 이상 되는 구참스님이 한다. 입승의 역할은 안거가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래서 입승은 원만해야 한다. 해제가 끝나면 가끔 스님들로부터 안거 중에 있었던 이야기 중 기억나는 게 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비구) 집단의 분위기를 해치는 악성비구가 있었는데 찬타카라는 부처님 출가 당시의 마부였다고 한다. 그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였는데 부처님만 안 계시면 "내가 부처님을 출가시켰다."면서 부처님 제자들을 깔보기 일쑤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자 "묵빈대처(默賓對處) 하라"고 하셨다. 아무 말하지 않고 외면하라는 말이다. 스스로 허물을 깨닫게 하라는 의미다. 수행자들이 일정기간 모여서 수행을 하는 것을 안거라 하는 데 하안거, 동안거 각 90일씩이다. 각자 개성이 강하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끼리 모여 안거를 하다보면 꼭 찬타카같은 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란다. 그러면 대중들을 모아 잘못을 논하는 대중공사를 벌여 대중의 결정에 따라 조치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옹호하거나 지적하는 편이 꼭 갈려 안거가 끝날 때까지 후유증이 심해지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입승의 지혜로 정리되곤 한다. 그래서 입승을 아무나 뽑지 않는다. 지혜가 있는 입승은 논란거리를 사전에 방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승려생활도 오래하다 보면 초심을 잃고 힘이나 세력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보니 힘센 사람에게 아부하고 기강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럴 때는 입승이 그런 이를 조용히 불러 눌러버릴 필요가 있다. "다시한번 그러면 아구창을 날려 버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내가 잘 아는 스님이 입승 소임을 보면서 했다고 한다. 입승 소임이 쉬운 게 아니다. 안거가 끝나는 전날에는 자자(自恣)가 열린다. 허물을 스스로 알기 힘드니 서로 지적을 해줘서 반성하는 시간이다. 취지는 좋지만 실상 지적을 받으면 "내가 뭘 잘못했어요."라고 간혹 반발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만큼 허물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하심(下心)을 하고자 모인 수행자들도 이럴진대 세상사람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싫은 말을 들으면 꼭 보복을 하기마련이다.
국세청 재직 시 경복궁 산책을 가끔 할 때 청와대가 뒤에 있는 북악산을 볼 때 마다 생각나는 게 봉암사 희양산이었다. 둘 다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고 삼각형 모양인데 희향산은 북악산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다. 그 산들을 보면 맨 먼저 느끼는 게 ‘아 좋다!’ 이런 게 아니라 사람으로 치면 사고뭉치 같이 말 엄청 안 들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산 기운이 억세다. 보통 그런 산 밑에는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도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한다. 사고뭉치 같은 사람들이 살든지 수승한 수행승이 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한다. 봉암사도 예전에는 술 먹고 주먹질하는 중들이 모여 살았는데 지금은 수행을 여법하게 하는 수좌들이 모여 정진하는 곳으로 변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철스님이 1947년에 젊은 수좌들과 의기투합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고 결의한 봉암사결사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결기와 기개가 있는 이들이 필요한 시대다.
최근 만난 유명한 미술관장님이 해준 말씀이 생각난다. 예술가는 표면에서 더 나아가 본질을 보려고 한다. 이런 것에 익숙해있으니 친구들을 만나도 자식이야기 남편이야기를 하면 따분해서 같이 못 앉아 있는다고 하였다. 1년에 한번이나 만날까 말까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틀에 박힌 시간을 보내다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을 때 인생을 후회한다고 한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 데 스스로 틀에 벗어나면 죽는 줄 알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잘 되기 위해 평생을 줄달음치다가 결국은 늙는다. 사람들은 예술가작품을 보면서 저런 게 무슨 돈이 된다고 저런 것에 시간을 보낼까 의문이 드는 이유는 표면만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 본질을 보고 표현하고자 하는 게 예술이다. 인생도 예술이다. 그러러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앵무새가 아닌 자기만의 언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