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진해 벚꽃 보러 군항제 3일 전인 3월 19일에 갔다가 꽃 한 송이 보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 뒤로 한 채 28년만에 가본 가야산 해인사 저녁예불과 새벽예불, 말사인 심원사 일출로 대신하여 봄을 맞이하였다.
3월 30일 서울에서도 응봉산 개나리꽃 일몰과 야경을, 31일에는 영종도 마시안로에서 코발트색 블루 일몰로 3월의 마지막날을 장식하였다.
4월 첫날은 서울 석촌호수 벚꽃 일몰로 본격적인 봄을 맞이하였다.
2024년 이렇게 봄은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4월이 되면 가볼만한 곳이 충남이다.서산 개심사와 천장암, 예산 수덕사와 정혜사 등이다. 개심사는 왕벚꽃이 유명한데 가야산이 더 유명하다.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오래 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명산대찰이 되려면 화마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인연이 못되었던 것 같았다. 가야산에만 무너진 절터가 100여개가 넘는다 하니 조선시대 힘있는 양반들이 절터를 노렸을 법 하다. 절은 터를 잡을 때 빛과 물, 바람을 고려하여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인지 심사숙고하여 정한다. 산 사람에게 좋은 곳은 죽은 사람에게는 양지바른 곳이 된다. 서산 예산 홍성등 10개 마을을 내포라고 하는데 서해 바닷물이 내륙으로 들어와 포구를 이뤘다해서 그렇게 불렸다. 소금과 생선이 풍부했고 예당평야 삽교평야 등 들이 기름졌다. 탐관오리가 나오기 딱 좋은 곳이다. 순조때 추사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100여개 마을을 샅샅이 돌아다녀 14명의 현감을 파면하고 벌을 줬던 게 우연이 아니다.
가야사가 없어지자 암자였던 묘암사 등 산내암자 3개가 가야사로 통칭해서 불렸다. 묘암사에는 석탑이 있었는데 송나라 황제 진상품인 용담승설차와 그외 진귀한 물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바로 그 탑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왕이 두 명이나 나온다는 주술이 떠돌았다. 원래 가야사는 왕실사찰이었다. 장차 왕이 될 세자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보니 광해군의 아들인 이지가 서산으로 유배되어 20미터가 넘는 땅굴을 파서 강화도로 도망가다 방향을 튼 곳이 가야사였다. 왕실노비가 지역 사대부들을 호통쳤던 위세 등등한 곳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이 주술을 믿은 게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 묘암사를 샀고 불질러 아버지 남연군묘를 연천에서 그곳 석탑 자리에다 이장하였다. 석회벽을 두텁게 해서 도굴을 못하게 하였다. 그덕에 고종때 독일 상인 옵페르토가 조선인 양아치 두명을 가이드로 하여 150명의 도굴범 조직을 만들어 서해 행담도에 배를 정박한 후 밤중에 몰래 도굴하다 실패하고 줄행랑을 쳤던 역사가 있다.
주술의 효력인지 몰라도 대원군은 고종과 순종 두 명의 후손이 왕이 되는 몇 년간 가문의 영광을 누렸으나 결국 주술이 더 쎈 민비의 치마자락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치욕을 세세생생 남기게 되었다.
민비는 주술에 미쳐 좋은 터만 보면 산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그녀의 옆에는 무당이 있었고 그가 하라는 대로 하였다. 고종은 민비의 주술에 걸려 국사를 행하였고, 민비는 무당의 말대로만 하였다. 결국 그녀의 말로는 칼지옥과 불구덩이 화탕지옥이었다. 칼에 베여 시신이 불태워져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암매장 되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은 오건만 2024년 봄은 예전의 봄이 아니다.
임금 왕자를 새긴 대통령을 보면서 주술로 나라를 통치하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 그런가 의문이다.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들의 아가리에 스스로 지 머리를 갖다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구한말을 보는 듯해서 가슴이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