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홍련암 의상대사 반문문성

by lawyergo

속초 홍련암(보고 듣는 그 놈을 돌이켜 깨쳐라)


1997년 한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 속초행 비행기를 타고 일행과 같이 간 곳이 바로 속초 낙산사 바로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인 홍련암이었다. 흔히 동해 바다 위에 떠있는 절이라고 한다. 그 절은 의상대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기 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던 석굴 바로 그 장소로 낙산사의 근간이 되는 성지다. 화엄경의 진수를 체득한 당대 최고의 학승인 의상대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하자마자 경주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황량했을 이곳 낙산 해안까지 온 의상대사는 목숨을 건 기도를 하고 드디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원을 이루게 된다. 대사는 그 자리에 암자를 세워 ‘홍련암’이라 이름 짓고, 암석굴을 ‘관음굴’이라고 부르니 그 이름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대체로 오래된 절마다 각각의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데 홍련암에 얽힌 설화도 이를 그냥 지나치면 이야기꺼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고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면, 이 설화 속에는 의상대사의 극진한 신심과 치열한 구도의 정신이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관음신앙의 정수를 접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沙婆)는 인토(忍土) 즉 참고 견뎌야 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모든 중생은 많은 고뇌를 받으면서, 설령 고통이 따르더라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수많은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맴도는 것은 한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고(衆生衆生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慾不捨), 막지 않는 저 천당에 가는 사람 적은 것은 삼독심과 번뇌를 나의 집 재물로 삼기 때문이요(無防天堂 少往之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라고 설했다.


불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번뇌로 탐냄, 성냄, 어리석음이 있으며 이세 가지가 삼독(三毒)이라고 설하는데, 이 삼독은 백천만겁이나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뿌리 깊고 질긴 번뇌이다 보니 한 때의 수행으로 소멸하거나 죽는다 해서 결코 해결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래로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하여 믿어져왔던 관음신앙의 정수를 설하고 있는 관음경 서두는 무진의보살이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부르나이까?” 라고 부처님께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선남자여! 만약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중생이 있어서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곧 그 음성을 두루 관(觀)하고 모두 해탈을 얻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관음신앙의 대전제라고 한다. 우리가 자신의 죄업을 뼈져리게 자각한다면 자신의 모든 존재를 다 바쳐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一心)으로 부름으로써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게 되고, 이는 결국 자기 정화를 하는 것으로서, 번뇌를 멀리하고 관세음보살의 지혜와 자비를 자기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상대사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이유가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홍련암은 그의 신앙관과 치열한 구도자세를 알게 해주는 신앙의 결정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홍련암은 동해의 해돋이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캄캄한 정월 초하루 새벽에,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더니 새벽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새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그러나 수평선 바로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장관을 볼 수는 없었다. 그 곳 기도스님이 말했다.


“나도 1년 넘게 있었지만 그런 광경을 봤던 적이 한 두 번 밖에 없었습니다.”


붉은 해가 수평선에 걸려있는 모습은 사진 속에 나오는 것 같았다.


홍련암이 유명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법당 밑으로 바다가 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모습이 법당 밑으로 보인다. 가파른 절벽 사이 바위틈에 마치 새집을 지어놓듯이 절을 지어놨기 때문에 바다에 떠있는 절이라고도 한다. 넘실대는 파도의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은 법당 안 마루바닥의 작은 구멍때문이다. 법당 마루바닥 한 가운데에는 길이 8㎝ 정도의 정사각형 형태의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있다. 예전에는 그것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뚜껑을 열고 구멍에 눈을 바싹대고 들여다보면, 약 10m 정도 되는 절벽 밑 바위 틈새로 파도가 들락거리면서 하얀 거품을 내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의상대사가 672년 이 절을 창건한 이래 수많은 보수공사가 있었음에도 이 구멍만은 일관되게 유지되어 언제고 존재하는 홍련암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 구멍을 통해 바다를 들여다보지 못하면 홍련암을 보지 못한 것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러나 소금기가 밴 바다 바람인 해풍이 목조건물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는데도 옛 선조들이 가람의 훼손을 감수하며 법당마루에 구멍을 뚫어 논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단순히 흥밋거리를 위해서 구멍을 뚫었을까? 왜 구멍을 뚫었을까? 여러 번의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왜 그 구멍만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은 구멍 밑 동굴에 상주한다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라는 거다. ‘삼국유사’ 의상대사 관련 기록에는 지금의 홍련암 자리 아래 관음굴에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홍련암 법당 마루에 구멍을 뚫었다는 것이다. 또 의상대사에게 여의주를 바쳤다는 동해에 살고 있는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해조음(파도소리)’를 관(觀)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이근원통 수행을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다.


능엄경에 이근원통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육근(六根) 중 가장 총명한 청각을 통해 삼매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소리를 듣는 '귀뿌리‘를 돌이켜 소리 끝에 깨친다는 수행법이다. 먼저 내면의 소리(內耳聲)와 바깥 소리(外耳聲)에 집중하고, 마지막 단계에는 ‘소리를 듣는 이 놈이 뭣꼬’ 하면서 반문문성(返聞聞聲)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먼저 내면의 소리다. 고성염불을 하면 몸에 진동이 생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진동이 온 몸에 퍼지면서 세포들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속으로 웅얼거리는 거다.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입 속으로만 웅얼거린다. 그러다 굳이 입 속으로 웅얼거리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마음 속으로 염하는 단계가 되면 수행의 힘을 얻는 경우가 된다.


다음은 바깥의 소리다. 어떤 소리든지 물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인데,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나 범패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 중에서 가장 좋은 게 해조음(海潮音) 즉 물소리라고 한다. 일본 니혼대에서 실험한 결과 해조음이 실제 뇌의 알파파를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절터를 잡을 때 양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을 선호하는 이유도 그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마지막 단계는 듣는 성품 자체를 다시 반문하는 ‘반문문성(返聞聞聲)’ 이다. 듣는 그 놈을 돌이켜 깨치는 것이라고 한다. 선사들 가운데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에 또는 닭이 날개치는 소리를 듣고 견성오도(見性悟道)했다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한다. 西山대사도 대낮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 오도했다고 한다.


능엄경 원통장에 보면 관세음보살은 소리를 관(觀)하는 이근원통 수행법으로써(觀音) ‘온전히 통함(圓通)’을 이룬 원통삼매를 얻었고 이로 인해 14무외력과 4부사의덕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분을 ‘이근원통 관세음보살’ 또는 ‘원통교주’라고 하는데 ‘원통’이란 관세음보살님의 덕이 모든 것에 두루 원만히 통한다는 뜻으로서 중생의 소리를 가장 잘 듣고 바로가서 구원해 준다는 의미다. 결국 관세음보살은 천상천하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소리를 들으며 속세의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聖子)로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약칭하여 ‘관음보살’이라 부른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주법당일 때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은 동해 서해 남해에서 모두 볼 수 있다. 그래서 3대 관음성지는 모두 바닷가에 있다.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동해 홍련암이다.


대체로 시험에 떨어지면 수험생들은 동해 바다를 다녀오곤 한다. 바다를 보게 되면 뭔가 꽉 막힌 게 뚫리는 기분이 드는 것도 바로 해조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 본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다.


일주일이 다 되어 떠나기 전날 기도를 회향하는 의미에서 일행 중 한 분이 죽은 남편에 대한 천도재(薦度齋)를 지냈다. 법당 위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의식의 마지막 순서였다. 망자의 유품을 태우고 있었다. 연기는 바람 따라 허공으로 피워 올랐고, 재는 날아다녔다. 타는 재를 쳐다보면서 그분은 설움에 복받쳐 우는 울음인지 회한의 눈물인지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스님이 치는 목탁소리는 서럽게 들렸다. 그러나 바다는 그 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 멀리 수평선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너무 잔잔하였고, 다만 파도소리만 ‘철썩 철썩’ 들려왔다. 부서지는 파도는 수많은 흰색 포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치 우리 인생이 그 거품인 것 같았다. 아마 저 파도는 수만 년 전에도 똑같았을 것이다.


흔히 우리의 본성을 표현할 때 바다를 의인화한다. 우리의 본성은 바다와 같은 것인데 단지 인연 따라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칠 때 하얀 거품이 발생하듯이 우리도 인연 따라 사람 몸으로 태어나고, 거품이 꺼지듯이 우리 육신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육신은 거품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 본성은 바다와 같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한 생만을 생각한다면 하얀 거품처럼 살겠지만, 바다가 나의 본성이라 생각한다면 거품같이 허망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 반해 ‘만일 내일 죽는다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 살아가는 행태가 다를 것이다. 지옥과 극락이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믿는다.


“아름다운 색깔을 내기 위해 가을까지 인내하다가 가장 아름다울 때 스스로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는 나무를 볼 때 나의 삶도 그럴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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