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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를 나왔지만, 나는 약국에 가지 않았다

때로는 모험을 하는게 인생의 묘미다

by 이일형 변호사

약대를 졸업한 날, 내 손에는 약사 면허증이 쥐어져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파트타임 약국을 알아보고 있었고,
어떤 친구는 대형 병원 약제부 면접을 준비 중이었다.

“너는 어디로 가?”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사실은,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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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국을 ‘가야 할 곳’이 아니라
‘생각해봐야 할 곳’으로 받아들였다.


약대에 진학한 것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공부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내 안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단지 약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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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실습 중,
나는 병원 회진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한 교수님은 복합 항암요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약이 아니라, 전략입니다.”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약을 '화학물질'로만 공부했지만,
그 순간 약은 '결정'이자 '정책'이었고,
누군가의 생애를 바꾸는 명령문이라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단지 조제실 안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약을 둘러싼 구조, 제도, 권리, 책임.
그 전체를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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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약국 대신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스쿨 입시 책을 품에 안고.

남들이 약국 실무실습을 다닐 때,
나는 또다시 입시를 준비했다.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들 나를 만류했다.
이미 안정된 진로가 눈앞에 있지 않냐고.
그러나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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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된 지금,
나는 제약회사의 특허 분쟁과 의료소송을 맡는다.
의사가 설명하지 못한 치료,
제약회사가 놓친 특허,
환자가 충분히 알지 못한 투약.

그 모든 쟁점 속에 ‘약학’이 들어 있다.
약대를 나온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결이 있고,
그 결을 이해하는 법률가가 얼마나 필요한지도 절감한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선택을 지금도 만족하고 있다.

내가 한 선택이 얼마나 잘한 것인지, 늘 감사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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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은 여전히 중요한 공간이다.

나는 파트타임으로 약사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래서 로컬에서 일하시는 약사님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지, 또 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더 잘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약사 직능을 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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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넘게 한마디 하자면,

때로는 모험을 하는게 인생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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