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이혼하기 위해 나는 울산가정법원 제506호 법정의 문을 연다. 7년 차 이혼전문변호사의 일상은 헤어지고, 헤어지고, 또 헤어지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내 의뢰인과 배우자가.
왜 하필 이혼이냐고 물으면 나의 답변은 간단했다. "첫 직장이 이혼전문 로펌이어서". 나의 선택은 이따금 그렇게 별 것 아닌 이유로 이루어지곤 했다. 첫 직장이 이혼전문 로펌이었던 이유도 간단했다. 그곳은 사법연수원 바로 앞에 있는 로펌이었고, 나는 이사 가기가 싫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이사 가기가 싫었고, 이사 가기가 싫어 연수원 근처에서 첫 직장을 구했고, 하필 그 첫 직장이 이혼전문로펌이었을 뿐이다. 이혼과 나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이혼 법정을 드나들 때마다 슬펐다. 한 때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이들이, 어쩌다 이렇게 차가운 법정에서 서로를 날 선 말로 베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가정의 숨통을 끊는 저승사자, 가족의 사망을 선고하는 의사 같다고 생각했다.
3년 차가 되자 이혼 사건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법 논리가 아닌 질척거리는 감정만 오가는 법정이 지긋지긋했다. 마침 당시 모시던 대표 변호사님께서(첫 직장에서는 이직을 했다) 내게 사무실에서 진행 중이던 지역주택조합 사건 모두를 일임하셨다.
사건 진행을 위해 주택법을 공부하면서 나도 대표님을 따라 건설대학원을 가볼까, 건축법 공부를 위해 공인중개사 시험을 쳐볼까 고민했다. 수십억짜리 공사 대금이 왔다 갔다 하는 사건을 직접 진행하면서 나는 건설 전문 변호사를 꿈꾸었다. 건설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변호사라니, 스케일도 크고 멋져 보이지 않은가.
그러다 개업을 하고 우연히 블록체인 스타트업 회사의 법무이사직을 맡게 되면서 한 때는 스타트업 전문 변호사를 꿈꾸기도 했다. 신규 사업의 법적 문제를 해결하고, IR에서 투자사에게 우리 사업의 법적 타당성을 설명하며 너무도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블록체인은 아직 우리 법상 온전한 규제 영역으로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합법과 위법 사이의 살아있는 경계를 넘나 든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일하면서 카이스트 대학원에 진학해야지, 엑시트 후 나의 회사를 차려야지라는 꿈을 꿔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지분 비율을 두고 회사와 이견이 발생하면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변호사 5년 차 때의 일이다. 일을 하며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과도 인맥을 쌓았지만, 스타트업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지친 나에게는 도약보다는 안정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잘하고 많이 해왔던 일은 바로 이혼이었다. 나는 이혼씬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부동산과 스타트업을 두루 거친 후 다시 돌아온 이곳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는 그토록 듣기 싫었던 의뢰인들의 감정 섞인 하소연. 그것이 그렇게도 반가웠다. 나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의뢰인들은 하나같이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배우자와 가족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거나, 혹은 오랜 갈등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이었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다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순간, 그들은 나를 찾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들을 구조했고, 수렁 밖으로 나온 의뢰인들은 고맙다고, 이젠 살 수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저승사자도,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도 아니었다. 의뢰인들에게 나는 구조대였다. 한 사람, 한 사람 건져내는 작업(?)을 하면서, 나는 이혼에서 보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 싫어서 도망쳤던 이혼이 이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 되었다.
이제야 나는 스스로를 자랑스레 이혼전문변호사라고 소개한다. 나는 수렁에 빠진 이들을 구조하는 구조대고,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배달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울산가정법원의 문을 두드린다.
오늘도 이혼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