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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잘깔딱센의 종말, 혹은 격상

눈치의 시대는 가는가

by 오아영 변호사


처음 '알잘깔딱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슨 암호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아서 잘 깔끔하고 딱 센스 있게."

이게 뭐라고. 그런데 이 한 문장 안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요구와 바람을 담아왔던가.

굳이 말로 풀지 않아도,
눈빛 하나, 말투 하나, 침묵의 무게까지 읽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알잘깔딱센'의 본질이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 노동’을 기대하며 살아왔다.
너무 말하면 센스 없다고 하고,

말 안 하면 답답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말 사이를

눈치’라는 기묘한 언어로 채워왔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 눈치라는 것을

구체적인 텍스트화시키는 훈련을 시킨다.

인공지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자신의 요구를 수 차례 프롬프트 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왜 이걸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하지?'
결국 이렇게까지 정밀하게 요구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란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결정적인 차이다.
우리는 ‘눈치’로 소통해 왔고,

기계는 ‘정의된 지시’로 움직인다.

여기서 깨달았다.
알잘깔딱센은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었다는 것.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읽어내는 것.
수많은 말 이전의 맥락을 추론해 내는 고도의 공감능력.


즉, 그것은 인간이 가진 센스,
혹은 제6감(Sixth sense)이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앞으로 알잘깔딱센은 이제 사라지는가,

아니면 더 귀해지는가.

AI 시대, 우리는 분명 정밀해지고 있다.
요구하는 법을 배우고, 프롬프트를 짜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코딩하듯 지시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생산적이지만,

동시에 피로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히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 가치는

더욱 또렷해진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상대를 위해 상상한다’는 뜻이다.


기계가 흉내 내지 못하는 가장 인간적인 사고.
그래서 알잘깔딱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격상’되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고급 기술을 발휘할 일자리가 남아있느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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