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출장 가서 조식을 먹으면서 추억을 곱씹기 위해 여느 때처럼 나또와 우메보시 그리고 팬케이크를 접시에 담았다.
1. 나또와 우메보시
2006년 1월에 일본으로 단기 선교를 갔었다. 사해경 선교사님 댁에 머물면서 단기 선교를 하였는데, 매일 아침마다 빠짐 없이 등장한 조식 메뉴가 나또와 우메보시(매실을 절인 것)였다.
당시까지 나는 한 번도 나또와 우메보시를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먹을 때는 그 맛도 잘 모르고 그냥 먹었다.
그러다가 먹으면 먹을수록 그 맛의 진가를 알게 되었고, 단기 선교 마지막 즈음에는 정말 맛있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또를 즐겨먹었다).
그런데 사실 나또와 우메보시가 맛있었던 더 큰 이유는 사해경 선교사님께서 나를 무척 사랑해주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2005년 12월부터 한 달여간 인도단체배낭여행 인솔자를 하였었는데 위 인솔이 끝나고 곧바로 인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갔었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미리 와있던 단기선교팀에 조인을 했었다. 나와 달리 이미 많은 준비를 하고 온 팀에 녹아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크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해경 선교사님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셨다.
선교 말미에 사해경 선교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 난다.
"선교사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외로움입니다"
나는 위 단기 선교 이후로 조식 메뉴에 나또와 우메보시가 나오면 꼭 접시에 담아 먹곤 한다. 나또와 우메보시를 먹으면 사해경 선교사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2. 팬케이크
2006년 겨울에 나는 뉴욕주 버팔로에서 교환학생으로 수학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버팔로에 폭설이 내려 3박 4일여간 도시 전체가 블랙아웃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마트도 식당도 모두 문을 닫았고, 학교 바로 앞 마트에는 약탈도 일어났었다(정전으로 보안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틈을 타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이 약탈을 저지른 것이었다).
첫날은 콘프레이크와 아직 상하지 않은 우유 등으로 겨우 버텼는데 하루가 지나가면서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도 모두 상하여 버리게 되었고, 그야말로 먹을 것이 없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다음날에 무엇을 먹어야할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러한 걱정 가운데 추운 기숙사 방 안에서 겨우 잠을 청해서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성영아 형이야! 여기 너 말고 예슬 자매도 있지? 예슬이도 데리고 밑으로 내려와"
버팔로한인장로교회(bkpc)의 청년부 전임 회장 형이었다.
그런데 그 형은 분명히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job을 구하기 위해 약 한달 전에 버팔로를 떠나 뉴욕시티로 갔었던 형이었는데 어떻게 우리 기숙사 앞에 그것도 이른 아침 시간에 그 심한 폭설을 뚫고 슈퍼맨처럼 갑자기 나타나게 되었는지가 너무 궁금하였다.
나처럼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어하고 있던 예슬이를 불러서 같이 밑으로 내려갔다.
태양처럼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 형의 첫 마디는
"배고프지?" 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차에 타라고 하고는, 도시 외곽에 전기가 들어오는 한 팬케이크 식당이 있다며, 약 1시간 반을 운전해서 그 곳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놀랍게도 그 식당에는 무슨 피난민들이 와서 줄을 서있는 것처럼 아주 긴 대기 줄이 있었고, 우리도 그 끝에 서서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식당에 들어거게 되었고 그 형은 우리를 위해 팬케이크와 따뜻한 차를 주문하였다.
이내 나온 팬케이크와 차를 허겁지겁 먹고나서야 나는 정신을 좀 차리게 되었고, 어떻게 뉴욕시티에 있던 형이 갑자기 이른 아침에 버팔로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물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job은 구했는지도...
열심히 구직활동 중인데 아직 job을 구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어제 저녁에 뉴스를 보는데 버팔로에 폭설이 내려서 도시 전체가 블랙아웃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밥도 못먹고 기숙사에 갇혀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길로 밤새 차를 운전하여 뉴욕시티에서 버팔로로 건너왔다고 하였다.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삼켰다.
뉴욕시티에서 버팔로까지는 날씨가 좋을 때도 차로 8시간에서 9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폭설까지 내렸으니 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길었을까.
그럼 우리에게 팬케이크 사주고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묻자 다시 뉴욕시티로 간다고 하였다(말이 쉽지, 우리에게 팬케이크 사주겠다고 잠 한숨도 안자고 왕복 18시간 운전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폭설로 얼어있는 빙판도로 위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그것도 아직 취업도 하지 못한 미취업자가, 매우 긴 물리적인 거리와 힘든 환경을 다 뛰어넘고 우리에게 베풀어준 믿기 힘든 아가페적 사랑이었다. 형의 위 섬김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30대 초반에 저렇게 후배들을 섬겼는지, 아니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지금에도 과연 나는 저 형 섬김의 10분의 1 정도라도 흉내를 내고 있는지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위 일 전까지 팬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사실 지금도 팬케이크라는 음식 자체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위 일 이후로 조식 메뉴에 팬케이크가 나오면 꼭 접시에 담아 먹곤 한다. 팬케이크를 먹으면 2006년 추운 겨울에 그 형이 베풀어주었던 헌신적인 섬김과 사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대문호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내가 나또와 우메보시를 먹는 것도 실은 사랑을 먹는 것이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팬케이크를 지금까지도 늘 먹는 것은 사랑을 곱씹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