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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Dec 18. 2021

한국 회사에는 있지만 독일 회사에는 없는 것

퇴근 후에는 회사 일을 생각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

인도에 있는 협력사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의 일이었다. 우리 회사와 같이 진행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협력사 쪽에서 이벤트 당일날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WhatsApp (한국으로 따지면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으로 커뮤니케이션했으면 한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WhatsApp은 핸드폰 번호를 통해서 등록이 가능하고, 상대의 번호를 등록해서 채팅창에 들어서면 내 번호도 알려지기 때문에 나는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내 라인 매니저에게 그 이메일을 forward 하고, 이렇게 말했다.


"OOO 쪽에서 왓츠앱 달라는데, 난 주기 싫어. 안 줘도 되지?"


그러자 내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래서 협력사 담당자에게 나는 Business phone이 없으므로 왓츠앱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어려울 것 같다고 전달했다. 여담이지만 그쪽에서는 같은 질문을 두 번 정도 더 했었다. 정말 왓츠앱을 선호하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그 협력사 쪽이 우스워서도, 우리가 협조적으로 나가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순전히 내가 "business phone"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으로도 충분히 원활한 이벤트 진행이 가능했다.




업무용으로 전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 business phone을 주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핸드폰을 회사 일을 하는데 쓴다. 협력사와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동료들의 핸드폰 번호 정도 저장해두는 것은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다. 특히 상사의 핸드폰 번호라면 더더욱.


내가 내 매니저의 핸드폰 번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입사 후 3-4개월 정도가 지난 후였다. 매니저가 조금 긴 휴가를 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긴급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연락 하라며 번호를 주고 갔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는 그 번호를 저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매니저 역시 내 번호를 물어본 적도 없었고, 추후에 알게 된 후에도 핸드폰으로 연락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독일의 기업문화와 조직문화의 이런 칼 같은 면을 좋아한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칼로 자르듯 딱 떨어지는 것이 좋다. 회사 노트북을 닫으면 나는 회사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회사일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수 없고, 퇴근 후에는 정말 회사가 두 쪽나거나 내 지위가 두 쪽날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나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다. 독일의 워라밸 (work-life balance)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말로 유연한 탄력근무제 (말만 탄력근무제인 탄력근무제 말고 진짜 탄력근무제)와 초과근무(overtime)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문화 때문인 것 같은데, 나는 여기에 이러한 공과 사의 칼 같은 구분이 큰 몫을 한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회사는 내가 회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장비들을 지원해줘야 한다. 회사에 입사했는데 "노트북 있으시죠? 노트북 가져오세요. 그걸로 일합시다."라고 하는 회사가 없듯이, 핸드폰도 예외는 아니다. 핸드폰은 내 소유의 물건이고, 회사가 함부로 내 물건을 사용할 권리는 없다. 회사 사람들과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필요한 장비는 회사가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핸드폰으로 그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면 회사에서는 핸드폰을 제공해줘야 한다. 


그래서 독일 회사에는 소위 말하는 "카톡 감옥"이 없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는 일도, 일이 끝나고 나서 회사 사람들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일도 없다. 그래서 진짜 "저녁"이 생긴다. 퇴근하고서도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면 친구나 가족, 연인과 즐기는 저녁식사도, 휴식도, 그 어느 것도 온전히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워라밸은 야근을 없앤다고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이렇게 업무 외 시간에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회사 노트북을 딱 닫고 나면 나에게는 다른 세상이 열린다. 내 평소에 사이드잡으로 하고 있는 사업을 돌볼 수도 있고, 취미생활을 할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창의성을 많이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렇게 일을 덮어두고 다른 일을 하다가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입사 후 내가 이뤄낸 굵직한 성과들은 이렇게 쉬는 동안 받았던 영감들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회사는 내게 쉴 자유를 보장해 준 것뿐이지만, 나를 들들 볶아서 일을 시켰을 때 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낸 셈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hard-working의 신화에 감동받지 않는다. 내가 창업해서 가꿔나가고 있는 회사 역시 사람을 갈아 넣어서 결과를 만드는 회사가 아닌, 효율적으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만드는 회사로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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