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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Aug 27. 2020

지난 여름, 이사를 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은 때에 모든 우선사항들을 뒤로 미뤄두고 안전 확보를 위해 집에만 박혀 지낸 지 수개월이 지난여름. 프랑스 파리엔 이동제한명령 confinement 이 내려져 매일 밤 의료진들을 격려하는 박수갈채가 텅 빈 거리를 메우곤 했다. 이대로 석사 졸업도 미뤄지고 집 밖에도 못 나가는 답답한 삶이 계속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던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이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집을 찾는 사이트에 점찍어두었던 동네 위치한 집이 올라왔다. 이때가 아니면 영영 이사를 못하겠다 싶어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한 후, 일을 끝마치는 대로 집을 방문했다.


집은 좋아하는 카페 르 피에로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 6호선이 지나는 큰 대로변에 있어 건널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쏟아지고, 그런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유리잔이 챙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레스토랑이 가득한 중심가. 거리는 한산했지만 골목에 위치한 집은 소음이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글을 쓰고 싶을 때, 노트와 펜 하나를 달랑 들고나갈 수 있는 곳에 살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해왔는데, 의외로 일이 잘 풀려 계약이 쉽게 성사되었다. 우당탕탕 준비 태세를 갖춘 후 그렇게 지난 7월, 파리에서 다섯 번째 이사를 했다.



예전 집은 중국 요리 음식점, 큰 대형 마트, 공원이 있어 생활권 냄새가 나는 편리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지만 주변에 갈만한 카페가 딱히 없어 아쉬웠웠다. 마음만 먹으면 이내 닿을 수 있는 카페가 사정거리에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 집에서 도저히 일이 성사되지 않을때 달려나가면 되고, 집에 커피가 똑 떨어졌을 때를 핑계로 카페 테라스에 앉아 바깥 햇살을 누릴 수 있으니까. 카페 르 피에로는 파리 중심가에 집을 구하면서 부러 한 달에 몇 번씩 찾아가곤 했던 단골 카페인데, 분주한 시간대만 피해 가면 여유로운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어 웨이터들과 친해지면 단골 자리도 찜할 수 있다. 테라스와는 적당한 거리가 있는 안쪽 구석에 앉으면 웨이터가 살짝 삐걱대는 낡은 테이블 위에 누아젯 커피 한잔과 물을 가져다준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철컹철컹, 하는 소리와 카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렉트로닉 음악의 베이스가 동시에 울려 소란스럽지만, 오랫동안 애정해온 카페기에 집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사는 인생의 3대 산이라고 했던가. 미니멀한 삶을 추구한다고 말은 하지만 살다 보면 딱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중 책이 가장 처치 곤란인데, 팔거나 주려고 정리해 놓은 책만 발치에 쌓여갔기에 작년에 한 번 크게 정리를 했는데도 다시 추려보니 몇십 권이 되었다. 파리에서 북 콜렉터가 될 것도 아니기에 미련 없이 버리자 싶어 이사 겸 정리를 했다. 한참을 치우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허리를 펴 보니 변변치 않은 옷 몇 가지, 신발 그리고 책, 커다란 책장이 보였다. 내 짐의 전부였다.



새 집에서 처음 맞는 아침. 옮기고 치우고를 하루 종일 반복한 몸은 아리는 근육통에 아우성을 친다. 오전 열 시가 되니 옆집에서 느지막이 준비하는 퀴진 향기가 서서히 퍼져 현관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크하는 향기에 몸을 서서히 움직이는 기분이 참 좋아 아침을 먹고 근처 꽃집에 가서 꽃 몇 송이를 사왔다. 화병에 꽃아 큰 창틀 앞에 놔두니 일렁이는 바람과 함께 꽃잎들이 춤을 춘다. 아직 가시지 않은 묵은 먼지 입자들이 살짝 날려 방안을 가득 채우지만, 따듯한 햇살이 반짝거려 괜찮다. 아직 아무도 들이지 않은 고요한 방은 이리저리 가구를 옮기기도 하고 꺄브에 짐을 덜기도 더하기도 하면서 점차 자리를 되찾았다.



잠깐이라도 내 몸과 마음이 머물 곳이라면 나의 향기가 가득한 안식처로 꾸미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계획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될 곳이니까. 2년 넘게 머문 지난 집 앞엔 센 강이 있었고, 그 강을 바라보며 책 두 권을 집필했다. 파리를 방문하며 집에 초대받은 친구들은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일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기도 했고, 기획부터 집필까지 밤을 지새며 글을 쓰다가 답답하면 집 앞으로 나가 강가를 산책하곤 했다. 혹독한 겨울을 따듯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곳이자 힘든 유학생활의 피난처였다.



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라는 사바랭의 말은 현대인들이 사는 곳에도 적용된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빌딩에 사는지가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 주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게 지난 집은 마치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런 행복한 곳이었고, 부엌엔 늘 맛있는 향기가 퍼지는 감사한 곳이었으며, 글을 쓰고 연습을 저녁에도 마음껏 할 수 있는 (파리에서는 찾기 힘든) 최적의 장소였다. 부촌 바로 밑에 위치한 16구 끝자락에 위치해, 센 강을 끼고 있던 집은 파리에서 살며 가장 기억속에 오래 남을 곳이 되었다.



또 다시 물건들로 그득그득 채워지고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는 책장이 없었다면 마구 어지러져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담한 곳이다. 하지만 매일 눈을 감고 뜨며 매트를 펴고 또 접으며 하루를 살아내기에 충분히 따듯한 안식처가 되었기에, 일시적으로 머물 곳이긴 하지만 벌써 애정이 깊어졌다. 아침 저녁으로 환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큰 창, 조용하고 따듯한 침실까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나의 몸과 마음을 금새 녹여준다. 이내 이 집에서의 목표도 하나 세웠다. 올해 3월부터 기획하던 책을 마무리 할 것. 그러려면 부지런히 글을 써야 하겠지만.


언제 즈음에야 나는 나만의 집을 소유할 수 있으며, 사랑과 지혜로 가득 채우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나는 꿈 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짐을 풀었다 쌌다를 몇 년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어깨에 이고 다니던 책과 악보, 몇 가지 옷들이 이만큼이나 불어난 웃픈 상황을 보면서도 금새 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파리에 짐가방 하나 매고 왔던 것처럼, 언젠간 가볍게 이 곳을 훌쩍 떠나게 되겠지. 집이 없는 서러움은 월세살이의 숙명이지만, 그래도 정착할 곳은 어디든 있지 않겠나 조용히 주문을 외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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