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백오십 개쯤의 물집
흥분을 담아두는 바구니에는 이미 가득 차고도 남을 시간이 피라미드처럼 쌓인다. 그 바닥부터 하나씩 모래 벽돌을 딛고 매일매일 한 칸씩 오르며 뜨거워진다. 꼭대기에 올라선 그날에는 디딘 발아래로 스르르 무너지는 모래를 따라 내키는 대로 흘러내리면 된다. 무엇을 잊었을까.
내일 할 또는 하고 싶은 무엇을 정해도 그 시간이 되면 바랐던 대로 서있지 못한다. 거의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어떤 결단이나 선택이 필요할 때마다 지금 살아있구나 문득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힘을 느낀다. 여지없이 웅장해지는 편두통을 따라 끌어야 할 무게를 감당하며 그 첫날을 나선다. 그날이 오면 반드시 떠나고야 말 거야 그랬다.
습관처럼 손톱깎이의 위치를 알리고 몇 개의 비밀번호를 쉽게 알 수 있도록 꽤 오랫동안 살던 장소와 사람들에게 세뇌시키던 나쁜 버릇을 버렸다. 그게 공포라는 걸 자신을 너무 사랑한 이기주의자는 몰랐으므로. 차차 철이 들어간다. 할 수 있는 건 씩씩하게 하고 벌릴 수 있는 건 단호하게 뒤돌아선다.
그 시간이 오자 여지없이 세포가 발열한다. 기쁨으로 올라야 할 온도가 차가운 땀이 되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결단, 그리고 선택에 대한 단단한 각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며 사는 거다. 길을 떠난다. 꽤 오래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다른 세상으로 이사하는 듯 새롭게 낯설게 보내고 싶다.
익숙한 것들에 애써 고개 돌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과 공간, 그 구석구석을 재배치한다. 사이에 끼어있는 자잘한 실수에 헛웃음과 물적 심적 손실의 상처가 크다. 노트북을 떠나보내고 무선 키보드도 떠나보내고 남은 건 달랑 손에 쥔 배터리 30%쯤 남은 스마트폰, 연결될 이유도 놓고 가니 꺼져버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말로 다 하지 못한 상처가 모여 생긴 투명한 물집들을 센다. 처음과 마지막의 온도차이를 도저히 극복하지 못한 예민함을 탓하지만 그 시작이 오늘의 익숙하지 않은 첫날이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한다. 책이 좋아 글이 좋아 쓰다가 읽다가 묶어 간직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나의 책, 너의 책, 그리고 해도 해도 모자라는 우리들의 시간에 관한 그런 이야기를 묶는다.
마음을 채울 기술자가 될지도 모른다. 심장에 담을 피처럼 진한 사람들의 흔들리는 눈, 뜨거운 오열과 마저 다 하지 못한 말, 잡지 못한 손에 대한 상처들을 보듬는 그런 공간을 기다린다. 몽상이 계속되는 사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리키는 방향에 눈을 두고 분주하다. 인공의 무수한 성취들을 보려고 떠나온 것이 아닌데 한마디 반응이 부를 분위기의 균열에 잠자코 그런 척한다.
시간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기꺼이 대가를 건네는 건 낯선 곳이기 때문이다. 변명이 번잡하지 않아서 그가 하지 않은 말만큼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자본주의의 민낯을 마주하며 씁쓸하면서도 잘했다 마음을 달래 본다. 나는 잘 오를 줄도 내릴 줄도 몰라 한참을 거리의 찬바람 속에 서있다가 세찬 재채기를 했다.
프라이버시 따윈 없는 세상에서 열어줄 수 있는 곳까지 주저 없이 보여주고 닫힌 문 앞에서 가장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거절마저도 밟으려는 세상의 속도와 속물주의에 신물이 난다. 친절을 가장한 필요 없는 정보들이 메신저에 쌓여 난지도가 된다. 그냥 나가 부딪힐 것이다. 헤매다 들어가는 곳에서 살 것이다.
여전히 따라붙은 과거의 찌꺼기를 뭉쳐두고 당분간은 여기가 어딘지 길을 잃을 것이다. 대체 어느 행성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