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엽편소설] 악몽과 도피의 낯빛
민세는 벌떡 일어나 이마에 손을 대며 찌걱거리는 차가운 땀을 닦았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옷장의 커다란 세로 거울에 하얗게 젖어버린 얼굴이 무표정하다.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헤어나지 못하는 걸까. 짧은 머리의 부스스 뻗친 모습과 흐릿하고 습한 얼굴이 겹쳤다. 거울에 비친 악몽은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새벽 3시, 막 정오를 지나고 있을 한국의 차가운 겨울 햇살이 그리웠다.
누군가를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를 촘촘한 보폭으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긴 트렌치코트에 마치 영화처럼 진회색의 중절모를 쓴 뒷모습이 실루엣을 불투명하게 흔들며 어디론가 급히 걸었다. 축축한 나뭇잎이 쌓인 골을 지나며 커다란 벽돌 건물이 보였다. 저기로 들어가려나 보구나 생각했을 때였다.
진한 안개에 가려진 문이 열리는가 했는데 걷던 사람의 검은 구두를 신은 두 발이 위로 천천히 솟으며 땅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 번의 거부도 버둥거림도 없이 그의 목이 황토색 밧줄에 감겨 올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이미 한 사람이 거의 같은 차림으로 허공에 걸려 있었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토사물을 느끼며 뒷걸음치며 웅웅 거리다 깼다.
창 밖은 어둠을 다 마시고 소리만 가늘게 흔들려 들어왔다. 긴 시차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하다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거의 열한 시간을 넘게 자는 중인데도 그렇게 빨리 안개 같은 죽음으로 들어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민세는 다시 생각했다. 돌아가면 그녀에게 헤어지자 해야지.
버스 안에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두터운 겨울 외투로부터 분주히 빠지는 먼지나 털부스러기에 얼굴이 간지러웠다. 민세가 탄 버스가 데칼코마니처럼 민세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큰 두 눈과 꽤 오독한 코가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이고 다소 얇은 입술이 예민함을 품은 듯 긴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버스 밖에서 민세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검은 실루엣이 움직일 때마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민세는 몸을 있는 힘껏 기울여 각도가 어긋나게 했다. 오른쪽으로 옆구리의 통증이 올 때까지 꺾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숨을 참았다. 두어 번의 좌절 후에 실루엣이 사라지자 민세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떠나가는 버스의 문 양옆에는 민세를 아는 듯한 얼굴 두 개가 밝은 표정으로 민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당황에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 민세는 그 사이의 커다란 문이 열 수 없도록 굳게 잠겨있는 것을 깨달았다. 닿을 수 없는 절망이 깊게 느껴졌다. 깊고 아픈 슬픔으로 가슴이 아려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고 오래 서 있었다. 누군가를 피하려다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는 그런 상실이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으로 왔다.
터질 듯 뜨거워진 눈 주변으로 이내 두통이 왔다.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두통약을 들고 휘청이며 주방으로 나갔다. 약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뜨거운 심장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계획했던 타지의 생활이 그 첫 단추부터 악몽으로 우울해지고 있었다. 두 알의 진통제, 마시다 남은 찬 커피가 한 번에 목으로 넘어갔다.
민세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아는 그녀가 가여워 민세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목이 졸려 올라가듯 발버둥 치는 시간이 민세의 낯선 공간을 채우고 있다.
도망자의 모습으로 흔들리는 민세의 비겁함이 비가 흐르는 통창에 갇혀 있었다.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