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1302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면 또 시작이구나 한다. 그 첫 순간이 그랬어. 네가 그랬지. 내가 하자 그런 건 아니야. 게임 규칙이 그런 거니까 난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네가... 그때 산은 결이 백 미터쯤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그 작은 공간을 날아 벽을 투명하게 뚫고서 아득하게. 산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몰랐다. 포실하고 부드러운 결의 손등을 따라 뻗은 긴 손가락을 멈칫멈칫 스쳐가며 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그랬지.
진한 눈빛을 한 남자 주인공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순진한 여자 주인공을 올려다보며 말해, 얼마나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을까,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이상하게 끌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했던 영화의 한 장면이 산에게 떠올랐다. 이내 산은 기억해 냈다. 산이 그런 질문을 결에게 했었다는 걸, 사실 질문이 아니라 갈증 같은 거였다. 어디까지...
적선하듯이 게임의 룰을 정해서, 입술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걸 했으면 최소한 그렇게 까지 비겁하지 않아도 될 텐데, 겁이 났나 보구나. 산의 눈물이 그렇게 속으로 말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서서히 조그맣게 자리 잡는 건 처음엔 수줍어서 그런 줄 알았다. 결이 산에게 예술가라고 할 때, 결이 숨어서 보내는 비릿함을 산이 한 아름 떠안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난 네가 원해서 그랬을 뿐이야. 죽을 때까지 비밀이야. 결이 말했고 산은 들었다. 끄덕끄덕.
자외선이 닿지 않는 산의 몸통 곳곳에 다시 열꽃이 돋았다. 햇살이 닿는 곳에 드러나지 않게 피부를 휘감으며 분홍색 꽃으로 피어나 자국이 생겼다. 하늘하늘한 이파리의 날카로운 끝은 퍼지고 커지고 많아져 상처가 깊었다. 결은 산이 그렇게도 듣고 싶어 하던 따뜻한 말들을 건네지 않았다. 결의 무심과 맞춰지지 않는 눈빛은 산의 마음을 꾸준한 갈증으로 움푹 파냈다. 얇은 살얼음 같은 슬픔이 조용히 산을 상처 냈지만 산은 무방비한 채 그대로 아파했다.
그 와중에 생긴 산의 몸통에 난 분홍색 열꽃은 마치 감기 몸살처럼 산의 이마를 뜨겁게 했다. 아무런 치료법이 없다는 그 꽃잎 같은 얼룩으로부터의 열기는 산에게 견딜 힘을 주었다. 두 달쯤 뜨겁게 아프고 나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 분홍색 장미 이파리 같은 무늬들이 그래도 견뎌내라고 산을 다독였다. 그렇게 견디다가 그다음 열꽃이 몸통에 다시 오를 때 산은 가만히 상처를 만졌다. 그리고 오늘 결에게 말했다. 이제 안녕.
가려진 몸통에 타오르는 열기가 지나간다. 뜨거움이 사그라들면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퍼지는 장미색 비강진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다. 산에게 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