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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2

[엽편소설] 797

by 서희복

주방의 커다란 나무 식탁 위에 시옷자로 벌어지는 하얀 조셉 저울을 펼쳐두고 그가 나를 부른다 그래 지금쯤 그의 방향으로 걸어가야겠지


글을 써야겠어요


내가 말했고 그게 나를 놓아주는 그의 시작이었다


그래


목을 조이듯 숨 막히며 뜨거웠다가 울타리를 한없이 넓혀주다가 그는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험하고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그냥 나를 거기 두었다 우두커니 그를 향해 서 있으면 그가 끄덕였다


글을 쓰고 싶어요


조셉 저울 위에 브라운 페이퍼로 된 여과지, 슬프게 갈린 진한 원두 가루


15g이야


본 적 없는 부피 속에서 나를 찾는다.


이거였구나 지금까지 나의 새벽 공복을 채우는 향


고마워


그와 내가 함께 같은 찰나에 보낸 한 마디


곁에 있으니까

지금 여기라서

나를 잡아줘서

너를 놓아주고


그는 매일 새벽마다 내가 마시는 커피를 내 상상 속에 밀어 넣는다 재료도 무게도 물도 아무것도 모르고 매일 진하게 혀를 천천히 움직이며 감촉하던 그 쌉쌀한 매혹을 그가 내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십오 그램


어쩌면 내 영혼의 깊이일지도 모르는 그 텅 빈 공간을 만드는 무게를 어떻게 견뎌야 할까 아득한 높이의 베란다 창에 붙어 땅보다 더 아래를 상상하고 있어서 새벽마다 항상 그랬지 천천히 뒤돌아 보니 그가 갈증으로 조급하다 어서


처음이 중요해 물이 떨어지지 않게 적시기만 해야 해 뭉근하게 폐포를 터뜨리듯 아픈 통증을 견디며 터지고 나야 커피의 진한 맛이 제대로 우려지거든 그리고 두 번째 반쯤 그런 다음 풍성하게


뜨거운 아메리카노


나는 그를 전부 알지 못하지만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싶어서 나를 둘 공간을 크게 상상하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에스쁘레쏘


그리운 너

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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