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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이 날아간 자리에는

[초단편소설] 2849

by 서희복

문지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현관 옆 붙박이 신발장에 들어있던 삼단 우산을 챙겼다. 비가 오는 소리가 났다. 우산을 들고 현관문을 열다가 다시 들어와 장화로 갈아 신었다. 언젠가는 꼭 신어야지 넣어만 두고 비 오는 날에는 정작 잊어버려서 한 번도 신지 못한 하얀 장화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서둘러 비를 쏟는 하늘 아래로 한 발 디뎠다. 두두둑 툭 투두둑... 그런데 갑자기 서두른 이유도, 비가 오니 우산과 장화를 고이 챙겨 신고 나온 이유도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어디를 가려고 했던 걸까? 메고 있던 작은 주홍색 클러치 백을 열고 무엇을 챙겨 나왔는지 들여다보았다. 차 키와 손수건, 그럼 보통은 영화관으로 가야 하는데 왜 장화를? 걸으려고 했던 걸까.


주형에게 헤어지자고 한 그날 이후부터 문지는 밖으로 나가야지 하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26층의 작은 원룸에 박혀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유라는 게 창밖으로 비상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비겁해져서 정말 팔을 날개처럼 펴고 창문을 열 것 같았다. 비가 오니 나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자유를 얻을 걸까. 주형? 나? 문지는 자유롭고 싶을수록 자꾸 안으로 타들어가는 얇은 종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타고나면 재로 날아 자유가 될까.


무작정 걸었다. 물 웅덩이에 일부러 들어가 물을 튀겼다. 사방으로 물이 튀면서 다른 쪽 장화 안으로도 흠뻑 들어갔다. 그래 그렇게 서로 튀기면서 같이 걸어도 좋았을 텐데. 문지는 그러지 못했다. 같은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주 보다가 가까워져 서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갈증 속에서 혼자 온도를 높였다가 사그라들곤 했다. 마치 태양처럼 표면의 태연한 섭씨 오천도 쯤을 항상 유지하는 것 같다가도, 문지의 가슴 끝, 천만 도가 넘는 극의 불꽃으로 빨려 들어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협을 느끼곤 했다.


주형은 그냥 항상 거기에 있었다, 앞이 아닌 옆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면서.


헤어진 후 열흘 내내 작은 주홍색 백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손수건이 든 백 안에는 주형과 같이 보곤 했던 영화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해가 쨍한 날에는 마치 쨍한 해를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나와서는 현관 앞에서 주저하며 서 있곤 했다. 갑자기 열린 방향에서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막막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속을 걸으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비는 그대로 문지를 관통 하려 애쓰니까.


장화를 처음 신고 나온 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상상의 웅덩이를 헤메다 우산 끝에 추적거리며 걸리던 빗방울을 뒤로하고 다시 26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젖어 뚝뚝 우는 우산과 하나도 젖지 않은 하얀 장화가 서로를 낄낄대며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다가 작은 야광 곰인형이 장식으로 달린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광 곰의 목이 부러졌다. 두 동강이로 서로 다른 구석으로 날아가 반쪽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두 구석이 환하게 보였다. 각각.


어쩌면 주형이 있을 곳은 문지의 구석이 아닌 다른 구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지의 곰이 날아가면서 다른 구석의 문을 열고 있었다.


빛을 내는 깨어진 곰 반쪽이 한 구석에 물구나무서서 문지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렇게 구석구석 잘 아물 줄 알았다. 문지는 분명 밀어냈는데 주형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알코올이 몸 안에 들어가면 더 취한다고 했던가. 날고 있는 비행기 높이쯤의 압력은 아니더라도 문지가 사는 26층도 꽤 술의 도수를 더 높여 줄 것만 같았다.


체온에 꼬냑의 사십몇 도를 더해서 칠십몇 도쯤의 온도로 일어나 물병을 더듬는데 누군가 찬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받아 마시고 눈을 뜨니 아무도 없다. 새벽 네 시. 식당마다 컵에 물을 따라 문지에게 먼저 내밀던 주형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아, 이제 그만하고 싶어. 내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했잖아.


꾸역꾸역 옷을 챙겨 입고 새벽 드라이빙에 나섰다. 문지를 위로하는 건지 비가 여러 날이다. 빗속을 달리다 문득 주형과 갔었던 무슨 청국장집이 근처라는 걸 알았다. 이 새벽에? 할머니가 하는 원조네 간판을 걸고 이십 사 시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검색으로 알아내곤 그리로 향했다. 골목을 꾸깃거리며 들어가 청국장을 시켰다.


비릿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삼겹살이니 고기도 구우며 파는 곳이었다. 문지는 도축장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도축장에 들어와 순서를 기다리는 소나 말일까. 육류 싼 랩을 벗기면 바로 훅 끼치는 냄새 같은 비위 상하는 공기의 울렁거림이 계속되었다. 전날 과음한 탓일 거야.


보잘것없이 나온 서너 가지의 찬과 진한 청국장, 말라비틀어진 밥풀이 여러 개 붙은 은빛 텐 그릇의 조합이 다시 눈물 나도록 속을 뒤집으려 했지만 수저를 들었다. 파김치가 왜 파 맛이 안 나는지, 총각김치는 왜 아삭하지 않고 휘청거리는지 청국장 한 스푼을 듬뿍 뜨자마자 구역질을 했다. 벌써 다 먹었어? 카드를 건네주면서도 울컥울컥 속을 다스리는데 주인 할머니가 그런다. 임신했구먼! 아이 씨, 그게 아니라니까요!


골목 귀퉁이의 카페에서 따뜻한 샷추가 아메리카노를 사서 비 오는 공원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주형이 살아는 있다는 회색 메시지를 매일 블로그에 올릴 때마다 슬쩍 지나치는 척 샅샅이 행간을 읽는 문지의 초라함이 스마트폰 줄의 야광곰이 깨져 나가 밝히고 있을 것만 같은 그 구석에 여전히 박혀 있었다. 더 밝은 비루함으로.


공원 화장실로 뛰어가 위장을 뒤집을 듯 다 토해냈다. 방금 마신 커피 색깔로 쏟아져 내린 토사물과 문지의 눈물이 범벅이 되어 비참한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는 비 오는 그 새벽의 공원 화장실에서 문지는 변기를 붙잡고 엉엉 통곡을 하며 마음껏 울었다. 보고 싶어.


곰이 날아간 자리엔 여전히 주형이 우두커니 서서 문지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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