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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무당 Jan 11. 2023

[독서일기]
평행한 세계들을 껴안기

: 포스트-매체와 포스트-미디어 담론을 다시 바라보며, 이현진

1.

   뉴미디어 및 미디어 기술을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매체' 자체로, 그리고 '예술작품의 제작 방법론'으로 발견하는 것은 이제 너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경험이다. 현대미술에서 디지털 미디어와 기술은 이제 온전한 예술 매체와 장르 내지는 표현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계에서 논의되는 예술 매체에 대한 담론이 과연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변화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을까.

    ● [포스트-매체(medium)] - 로잘린드 크라우스

    ● [포스트-미디어(media)] - 피터 바이벨, 레프 마노비치

   이러한 담론들은 이미 "최근 '뉴미디어' 예술이라 알려지게 된 예술"이 소개된 이후 지속적으로 빈번하게 등장해 왔다.


2.

   1996년 마노비치는 리좀에  「The Death of Computer Art」를 업로드하며 예술 미디어로서의 뉴미디어를 소개했다. 과감하게도 현대미술계와 컴퓨터 예술계 사이의 대립을 예견하며 전자를 뒤샹랜드로, 후자를 튜링랜드로 정리한 마노비치는 이 둘이 평평한 세계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라 말했다. 이후 1997년 로잘린드 크라우스를 통해 포스트-매체 논의가 시작되고 2006년 피터 바이벨의 「포스트-미디어 조건」이 발표되면서 마노비치의 예언과 같은 포스트-매체/미디어의 길항은 가시화되며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도미니코 콰란타는 이러한 대립을 Boho dance, 즉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구애를 펼치지만 번번이 거부되는 상황에 비유했고, 에드워드 샹컨은 이 둘을 혼종적 담론을 지향해야 한다고 제언하기에 이른다.


3.

   국내에서는 '미술사적 미디어 이론'과 '디지털 미디어 아트 이론'이 포스트-매체/미디어 담론의 이분 관계로 설정되었다. 외국과의 차이점은 포스트-매체 담론에 비해 포스트-미디어 담론이 상대적으로 충실하게 소개되거나 논의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뭐 대충 피터 바이벨이 포스트-미디어 조건을 기술 낙관주의, 기술결정론과 같은 디지털 유토피아의 나이브한 선언이자 디지털 이후의 예술 일반을 자폭시킨 대책 없는 포기 선언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비판으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담론이 모더니즘 미술 전통에서의 그린버그의 매체 특정성을 비판적으로 계승 및 갱신하는 차원에서 디지털 기술 시대에서 매체를 '기술적 지지체'라는 것으로 재창안 했다 - 로 정리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논의가 디지털 미디어 아트 혹은 디지털 미디어 이론보다는 현대미술 쪽에서 펼쳐지는 관계로 논의의 전체적 맥락과 이해가 여전히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루어질 필요하며, 이를 위해 크라우스의 기획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현진의 입장이겠다.


4. 

   먼저 크라우스가 포스트-매체 시대를 살펴보기 위해 '기술적 지지체' 개념을 통해 자기변별적 매체 개념으로서의 '매체 특정성'이라는 것을 갱신하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 질문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매체/미디어 개념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야기한 전통적인 예술과의 완전한 단절을 자신 있게 선언하면서 예술계에 일종의 기억상실, 아노미 상태를 불러일으킨 탓이다(대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미술 등의 '해체'를 위시해 예술을 자처한 것들). 이런 문제의식에서 크라우스가 매체 개념을 재창안하기 위해 '기술적 지지체'라는 개념을 내세운 것이 바로 이러한 기억상실, 아노미를 끊어내기 위한, 즉 전통과 역사의 비판적 계승을 위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기술적'이란 표현은 장인의 기술과 같이, 길드의 조직에서처럼 전통적 작업 방식과 프로세스의 방법론을 보유하며 묵묵하게 역사와 전통에 의거해 작업을 펼치는 방법과 형식을 의미한다.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논의를 해석한다면, 매체 특정성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변화하는 예술을 기존의 예술사 안에서 다시 읽기 위한 시도, 매체의 재발견을 통해 기존의 예술비평이 확보하고 있던, 작품 비평과 해석을 위한 미학적인 준거틀을 다시 객관적으로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 디지털 기술의 이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쓴 글이 『북해에서의 항해』이고.(「under blue cup」에서는 관습과 기억, 문화적 기억까지 포함시켜 포스트-매체에서의 '매체' 개념을 공고히 하며 그린버그를 연상시킨다.)

   그린버그는 자기 참조적이며 순수하고도 객관적인 비평의 기준, 지적이고 해석적인 준거를 세우고자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린버그는 이러한 비평적 태도를 통해 모더니스트 예술을 진정한 아방가르드의 역사로 증명하고자 했고 동시에 그러한 질적 수준을 갖추지 못한 대상들을 키치로 간주했다. 이러한 완고함 때문에 그린버그의 매체 특정성 입장은 형식주의적 사고에 얽매인 엘리트주의적 예술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크라우스의 형식적 일관성의 강조가 그린버그로의 회귀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크라우스의 주장은 예술의 자율성과 매체를 중심으로 진정한 아방가르드의 추동력을 이어가기 위한 시도라 해석되는 동시에, 대중 혹은 일반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태도에서 엘리트적 담론으로 읽힐 수 있다는 비판에 쉽게 노출된다.


5. 

   피터 바이벨의 입장은 포스트-매체 입장이 강조하는 '매체 특정성이 사라진 보편적 매체성(universal medium)'의 특징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읽혀왔다는 지적에서 출발한다. 피터 바이벨은, 키틀러와 같이, 분명 디지털 매체가 가진 보편적 속성에 대해 논한다. 그러나 바이벨은 그러한 속성 덕택에 포스트-미디어 조건하에 보편적 매체성을 지닌 미디어는 다른 전통적 미디어를 더욱 확장시키는 방식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미디어(new media)'를 통해 이전의 미디어가 더욱 새로워질 수 있으며, 자체적인 형식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포스트-미디어 이후 인터넷 시대를 통해 예술은 민주적이게 되어 누구에게나 열리게 되었고, 누구나 예술 작업을 하고, 창작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크라우스의 엘리트주의적 매체 특정성 논의와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보편적 매체성'과 '매체 특정성'이라는 논의 이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쉽게 말해 인류사와 함께해온 보편과 특수의 대립을 떠올리면 될 듯 하다.


6.

   이러한 포스트-매체/미디어 담론을 기술과의 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노비치가 지적한 뒤샹랜드/튜링랜드의 길항은 서로 다른 지적 전통의 오마주로서 세워져 있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영역은 과학과 문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술사와 예술비평이 기반하는 해석과 취향의 전통만큼  디지털 미디어 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및 기술 매체의 사용 원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사용하는 능력, 즉 디지털 리터러시 혹은 미디어 리터러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이 현대미술계와의 근본적인 분리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숙고될 필요가 있는 지점이라 생각되는데, 비숍의 말처럼 "디지털에 의한 분리(digital divide)"와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제기된 "기술적 어려움(technical difficultie)"을 논하는 일련의 글들을 매우 미미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가시화하고 있다.


7.

   전통을 고수하고 방어하려는 입장, 그리고 그러한 방어적 입장으로 기존의 전통이 변화된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승되지 못함을 답답해 한 입장이 포스트-매체와 포스트-미디어라는 길항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한 두 세계를 껴안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을 텐데. 음. 변증법을 통한 총체성의 회복이라는 기획으로 설정해 보자면 무엇을 어떻게 위치시킬 수 있을까? 또는 보편과 특수라는 인류사 일반의 문제의식을 어떻게든 종합하는 게 가능할 것인가?


   몰라, 내가 무슨 수로 알아 그걸.


독서 일기 끗.


※「평행한 세계들을 껴안기」는 동일한 제목의 책 『평행한 세계들을 껴안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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