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력과 속도 그리고 속초에 대하여
시작은 로봇청소기였다.
서른 넘은 자식 둘이서 아무것도 아닌 날에 생색 전혀 안 내고 아무 부담 없이 드리려 했던 그 로봇청소기를 고르다 나는 갑갑해졌다. 한두 시간 바이럴 광고 블로그와 최저가 쇼핑몰을 돌아다니곤 모두를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사기꾼 새끼들. 나는 뭐 어쩌자고 이 나이에 몇 천 원 때문에 이러고 있나.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나란 인간도 쓸모가 있을까.
당장의 갑갑한 마음을 길에, 바다에 던져 놓고 와야겠다. 그리고 내겐 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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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로 내려오자 아무도 없었다.
시속 팔십은 고속도로에선 느리지만 밤의 국도에서는 꽤 빠른 속도다. 아니 속력인가, 속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빨리 간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규정속도를 넘기엔 꽤 어둡고 꽤나 조용한 겨울 평일 새벽, 설악로 홍천에서 인제 방향 팜파스 휴게소 지나 1km 지점, 에 있던 ‘그것' 보다 중요한 일이었을까.
나는 그것과 부딪혔다, 허연 먼지 쌓인 국도변 갓길에서 무언가 번쩍 솟아올라서는 순간, 뻑! 드르르르르르르르. 브레이크!!
핸들의 진동이 잊히지 않아, 왠지 모두가 멈췄고 눈이 약간은 튀어나온 것 같았다. 뭐지? 쌓인 눈이 얼었나? 돌인가, 바닥이 긁혔나? 차가 굴러는 가는가 정상, 인가? 뭐 였지. 뭐였지. 뭐, 였지. 왠지 숨을 조금 가쁘게 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부딪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눈사람인가? 낙석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시동을 끄고 차문을 여는 데 까지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실제로는 15초 정도였을.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국도,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겨울 강원도의 밤.
차문을 열고 나와 뒤를 보았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불빛은 산골의 암흑에 흩어질 뿐, 한 발 한 발 걸어가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무언가를 향해.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차의 부러진 범퍼. 그리고 핏물 너머, 검은 물체가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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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가 정확히 어떻게 되세요 치우는 건 저희가 못하고요 지자체에서 나올 건데 그러니까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되세요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무슨 짐을 치었다는 거예요? 아 짐승이요 짐이 아니라 네네 네 탄현 1리는 먼데 여기서 아 팜파스 네네 네네 거기 지금 계세요? 거기 계시는 거예요? 네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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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크네 저거 네 범퍼 괜찮아요? 그래 그렇지 그렇지 저거 크네 놀라셨겠어요 왜 근데 기다리고 계셨어 그냥 가셔도 되는데.
아, 뺑소니 몰릴까 봐 그러시는구나
이거 처리는 저희가 못하고요 지자체에서 나올 거예요 이거 2차 사고 나고 그럴 수 있다고 조심해야 돼 들어가 계세요 아 사진 좀 찍어 놓으세요 보험에 필요할지 몰라 네 전부 다 나오게 차랑 다 여 끌린 자국이랑 범버도 그렇죠 저 표지판도 위치가 나오니까 걸어야지 그렇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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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홍천군청 네 글자를 새긴 흰색 트럭이 왔다. 언더테이커 같은 남자는 죽은 고라니를 언더테이커처럼 번쩍 들어 차에 싣고 떠났다.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말을 쉬지 않던 경찰은 눈이 튀어나와 있던 내게 길을 허락했다.
가시면 돼요.
묘하게 편해지는 문장이었다. 가시면 돼요 다섯 글자면 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한 시간을 기다렸을까. 나를 기다리게 만든 건 죄책감일까 보상의 두려움일까 혹은 그냥 놀랐을 뿐 일까.
시속 육십 킬로를 거의 오차 없이 맞춰 한숨 쉬지 않고 속초에 닿았다. 눈은 조금 튀어나오고 입은 살짝 벌리고 숨을 약간 빨리 쉬는 약간 이상했던 새벽 다섯 시 사우나에는 할아버님들이 안마의자 순서로 싸우고 계셨고 나는 약간 이상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약간 이상했던 것 같다. 꿈속에선 해수관음의 미소를 두른 고라니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의상대의 일출은 날이 흐려 볼 수 없었다. 고민을 털어버리러 왔는데 니깐건 아직 멀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 차를 추월하는 저 많은 차들이 두렵고 우습다. 뭐 얼마나 빨리 갈 거라고 너 임마 그러다 고라니 치어.
예, 가시면 돼요.
햇볕에 녹아내린 미시령 눈물이 타이어 핏물을 씻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