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공간, 또는 시스템의 맹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조회수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와 더불어,
재밌게만 보고 넘어가기에는 아무래도 아쉽다는 마음과 함께,
화제성이 떨어지기 전에 업로드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간단히 정리.
타이틀이 '기생충'이니만큼 영화에는 '기생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는데, 나로서는 '기생하는 사람' 보다 '기생하는 공간'이 더 흥미로웠다. 박사장의 저택에는 유명 건축가가 몰래 만들어 놓았다는 지하대피소가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수도나 변기 같은 설비와 전기 등의 필수적인 생명 유지 시스템을 본체로부터 몰래 가져다가 쓰고 있다는 점에서 '주택 본체에 기생하는 공간', 간단히 '기생공간'이라 부를 수 있겠다.
봉준호감독이 스포일러 누출 금지를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데 스포일러는 무엇이었나. '기생인간의 존재', 즉,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기생하는 상황'은 시놉시스에 훤히 드러나있다. 알고 보니 진짜 스포일러는 결국 '기생공간의 존재'였고, 이야기의 흐름이 극적으로 전환되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억울하게 쫓겨난 예전 가정부가 아크로바틱한 '수평부양자세'를 취하면서 '기생공간'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상승을 거듭하던 이야기의 흐름이 급격히 하강으로 전환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영화의 장르가 시트콤에서 스릴러로 급격하게 바뀌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연이 누구인지도 화제거리다. "당연히 송강호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니 송강호의 아들로 나온 최우식이었다."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진짜 주인공은 '기생공간'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방금 말한 것처럼 결정적인 스포일러이자 이야기의 가장 큰 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말이다.
재밌게 보긴 봤는데 정작 주제가 무엇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도 많다. 약자라서 선하지도, 강자라서 악하지도 않은 이야기 구조는 분명 신선하다. 그런데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선균 가족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그리고 송강호 가족이 저지른 잘못에 비해 끔찍한 응징을 받게 되는 결말은 아무래도 찝찝하며, 개운하지가 않다. 강렬한 감흥에 비해서 정작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나름의 고민 끝에 나는, 이 영화의 주제 또한 '기생공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의 메시지를 간단하게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기생공간'이라는 시스템의 오류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쯤이 되지 않겠나, 생각하게 되었다.
교훈을 찾는 것은 촌스럽고 따분한 일이다. 영화에 주제나 교훈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 우리는 주제와 교훈을 찾아내야 한다. 노골적으로 사회참여적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의 주제와 교훈을 찾아내는 일은, 가장 큰 불행을 겪은 이선균과 조여정에게서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는 일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겪은 불행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지 고민하는 일이다. 이선균 조여정 부부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이다. 가장 강한 사람들이지만 누군가를 착취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으며, 거짓을 꾸미지도 누군가를 속이지도 않는다. (거짓을 꾸며서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의 정당한 기득권을 가로채는 사람들은 약자인 송강호 가족들이다.) 약자에게 충분히 상냥하며, 딸과 아들에게 헌신적이고, 인간적으로 매력이 느껴질 만큼 어수룩하며,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면모도 있다. 가끔 이선균의 표정과 대사의 뉘앙스에서 우월의식이 살짝 드러나 거부감이 들 때도 있고, '냄새'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본의 아니게 전달되어 송강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모든 불행의 원인인 '기생공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이 커지면 집주인이 집의 모든 공간을 일일히 파악하기 힘들어지고, 집의 일부는 관련된 전문가의 영역이 된다. 차고는 운전기사의 영역이며, 부엌과 팬트리는 가정부의 영역이다. 집주인이 그런 곳에 오래 머물러야 할 일도 없으며, 그런 공간은 관련된 전문가에게 맡겨두고 적당히 출입을 삼가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그 공간에 속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집주인이라면 집이라는 시스템의 큰 줄기는 살펴보고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족이 소중하다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집을 충분히 모니터링하고 있어야 한다. 매일매일 드나들며 구석구석 기웃거리지는 않더라도, 가끔이라도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어쩌다 이상한 낌새라도 느껴진다면 끈질기게 확인하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경고는 꾸준했다. 어린 아들은 밤에 부엌에서 귀신이 나왔다며 울부짖었고, 동작감지 조명등은 뜬금 없이 깜빡거렸다. 아들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부엌 곳곳을 '직접' 살펴보았다면, 조명등의 깜빡임, 그 패턴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면, '기생공간', 즉, 저택이라는 시스템에 내재된 결함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딸과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비싼 값으로 좋은 선생님을 모셔오기도 하고, 아들의 트라우마를 달래기 위해서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캠핑을 떠나는 번거로움을 감수한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피상적이었고 아이들을 위한 그들의 배려는 구체적이지 않고 도식적이었다. 인디언 놀이에 집착하는 모습을 걱정하긴 하지만, 한번쯤 인디언 텐트 속으로 들어가서 눈높이를 맞추어 대화하진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깊은 관계를 맺는다기 보다는 관리하고 투자하는 편에 가까워 보인다. 대응은 하지만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집과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피상적이고 형식적이었다. 이 것은 그들이 바깥 세상, 즉 자연을 대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거실 쇼파에서 전면의 통창을 통해 바깥 마당을 바라보는 장면은 예고편에서도 힘주어 내세울만한 '간판 이미지'이다. 벽 전체가 창틀도 없는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인상적인데, 정작 마당으로 통하는 문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정도로 작다. 거대한 유리창으로 마당의 풍경을 스크린의 영화처럼 소비할 뿐, 마당의 소리, 냄새, 비, 바람을 몸으로 느끼지는 않는다. (이 것은 소독차의 연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들어오고, 한밤 취객의 주정소리와 눈빛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들어오는 송강호네 집 거실창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의도적으로 계산된 설정이었을 것이라 짐작하다.)
봉준호월드는 현실세계의 축소판이기에 의미가 있다. 이선균 조여정 부부가 남궁현민이 설계한 거대 저택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의 주인이고, 지역의 주인이고, 나라의 주인이다. 크게 보면 지구의 주인이기도 하다. 이선균 조여정 부부가 가정부의 영역인 팬트리를 매일 구석구석 살펴볼 수 없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듯, 매일매일을 그냥 살아가기에도 힘든 우리들이 온세상 사람들의 삶 모두를 살펴볼 수 없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뭔가 신호가 보인다면, 이상한 신호가 연거퍼 발생한다면, 알아보려 노력해야 한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하겠다 한다면, 그냥 귀찮아하지 않고 지하철역에 벽보로 붙어있는 그들의 메시지를 읽어보아야 한다. 비정규직과 파견근로의 문제를 호소하는 목소리를 흘려버리지 않았더라면, 지하철플랫폼 스크린도어를 점검하던 어린 청년이 비참하게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호는 다양하고 꾸준하다. 선글라스 쓰고 태극기 들고 주말마다 도심을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는 할아버지들의 목소리. 아,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한번쯤은 들어보아야 한다. 알아보려 노력해야 한다.
원래 짧고 간단하게 쓰려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졌어요. 하고픈 말이 더 많은데, 마무리를 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