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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Jul 12. 2019

행태를짓다3

통제의 풍경

주 : 오랫동안 다듬어 온 원고를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통제의 풍경



요즈음은 가볍고 투명한 유리로 벽을 세우고 문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공간을 가르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벽의 존재감을 최대한 흐릿하게 감추는 것이다. 건너편이 훤히 보여서 벽이 서있었는지 이곳과 저곳이 구분된 공간이었는지도 잘 몰랐는데, 문득 유리의 일부가 살짝 갈라지고 사람들이 그 틈을 통해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벽의 존재감이 약해지면서 문의 존재감 또한 덩달아 흐릿해진 것이다. 높고 화려한 벽으로 공간 통제의 힘을 과시했던 예전과는, 그리고 하나의 문이 건물이나 마을, 도시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던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벽과 문의 존재감이 흐려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정치적 권력의 차이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되었기 때문이겠다. 인류가 크게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한 이후로 사회 제도의 가장 중요한 근간으로 지속되었던 신분 계급의 차이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계급’보다 한결 순화된 ‘계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에 맞물려서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투명하고 개방된 분위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다. 대중을 향한 권력의 작동방식 또한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냉난방 비용 부담이 크다는 흔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시청이나 구청 같은 공공건물들의 벽이 꾸준히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자재와 기술의 발전 때문이겠다. 얇고 강한 강철기둥과 넓고 투명한 유리판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투명한 경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기술의 성취는 새로운 공간 개념 창출을 위한 영감을 주었고, 새로운 공간 개념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과 흐름을 함께 하였다. 대량 생산이 막 시작되었던 때의 유리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유리는 강도, 투명도, 크기, 열 차단 성능 등, 모든 측면에서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가볍고 투명한 유리 벽인데, 막상 깨 부수려고 하면 돌로 쌓은 벽 못지않게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핏 산뜻하게 투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찬찬히 들여다보면 빛이 반사되거나 교묘하게 코팅이 되어 있어서, 의외로 건너편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있는 듯 없는 듯 가볍게 서 있는 벽이지만 꼭 해야 할 기능은 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자 기술이나 생체 기술에 의해 즉각적인 신분 확인이 가능해지고, 신분 확인에 의해 공간 구성이 부드럽게 변하는 식으로 통제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몸으로 느껴지는 ‘통제의 풍경’이 많이 부드러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쇼핑몰 풍경을 보자. 가게와 복도의 경계는 투명한 유리벽이나 바닥재의 색깔 차이 등으로 가볍게 구분되어 있고, 들락거리는 입구는 아예 시원하게 활짝 뚫려 있다. 입구 근처에 지키고 서있는 사람도 없어서, 누구나 마음껏 가게를 들락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산하지 않은 채 상품을 갖고 나오기라도 하면 경고음이 커다랗게 울리고. 별 관심 없어 보이던 매장 직원이 득달같이 달려온다. 상품마다 태그가 붙어있는데, 그 태그에 입구에 붙어있는 센서가 반응하여 소리를 내는 것이다. 


오피스 건물의 로비 풍경을 보자. 멀리서 보면 아무런 통제 없이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 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낮고 얇은 담장으로 가볍게 구획되어 있고, 신분증을 감지하여 저절로 여닫히는 낮은 문이 설치되어 있다. 등록된 신분증이 감지되지 않으면 낮게 감춰져 있던 자동문이 갑자기 불쑥 높이 솟아오르면서 통행을 막는 식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다. 담장과 게이트 높이는 기껏해야 허벅지 정도까지 올라올 정도이고, 마음먹는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건너갈 수 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공간 통제 장치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누구도 보안을 의심하지 않는다. 신분 감지 장치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통제장치를 벽과 문 못지않게, 아니, 벽과 문 보다 더 크게 신뢰하기 때문이다. 


공간/계급 구분의 풍경


겉으로 또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아서, 

실감이 잘 나지 않을 뿐. 

벽과 문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고,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통제나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지만, 

알고 보면 여전히 통제되고 있고, 

변함없이 차이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 


통제나 차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느껴지지 않는 다른 차원의 수단에 의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 


이런 패턴은 건축과 공간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곧잘 찾아볼 수 있다. 옷만 해도 그렇다. 원래부터 옷은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왕자와 거지’라는 유명한 동화는 ‘옷이 곧 계급이었던’ 시절의 풍경을 드러낸다. 다른 계급의 옷을 입으려고 하면 목숨 버릴 각오를 해야 했던 때도 있었고, 계급에 맞지 않는 옷을 입히는 것을 형벌로 삼았던 때도 있었다. (백의종군) 하지만 지금은 군인처럼 제복이 필요한 특별한 직업이 아니면, 계급의 차이가 직접적으로 옷을 통해 표현되지는 않는다. 말단 사원이 입는 양복이나 회장님이 입는 양복이나, ‘양복’이라고 불리는 같은 종류의 옷일 뿐이다. 물론 브랜드가 달라서 질감과 디테일의 미묘한 차이가 있겠지만, 패션의 조예가 깊지 않은 보통의 눈으로 얼핏 보면 그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차이가 난다고 해도, ‘양복’이라는 하나의 스타일이 계급의 차이를 가로질러 공유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눈으로 보이는 신분의 차이가 과거에 비해 옅어졌다고 해도 차이나 차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취향으로, 또는 라이프 스타일의 미묘한 차이 등으로, 어떤 식으로든 차이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반영하는 통제가 멀쩡히 작동되고 있다. 잘 차려입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냥 그렇게 입은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떻게든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서비스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귀신처럼 감지하고 차별되게 대접한다. 디테일에 따라서 호칭이 달라진다. ‘사모님’과 ‘아주머니’.


투명한 유리가 벽돌 못지않게 강력한 것처럼. 

혹은, 교묘하게 감추어져서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문이 문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정말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지, 과연 같은 흐름에서 비롯된 비슷한 패턴인 것인지, 한 마디로 단언하긴 애매한 일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시대상의 흐름을 느낄 수 있고, 그 흐름과 함께하는 건축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공간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문의 존재감, 문의 아우라가 함께 희미해지고 있는 와중에, 거꾸로 ‘경계의 존재감’을 한껏 내세우는 경우도 보인다. 아파트 단지의 대문이 대표적이다. 


아파트는 대한민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히트상품이다.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겪었던 온갖 기술과 노하우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구석구석에 사용의 편리함과 시공의 효율성이 담겨있는데, 그래서 한 채 한 채의 아파트가 그리 색다를 것이 없이 ‘상향평준화’ 되었다. 하나의 디자인을 여러 시공회사가 함께 쓰기도 한다. 이 와중에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다른 아파트와 차별된 상품성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조경과 대문이다. 비교적 쉽게 ‘다르게’ 디자인할 수 있고, 돈을 쓴 만큼 금방 티가 나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파트는 여러 ‘동’들이 모인 ‘단지’이기에 의미를 갖는다. 한국이 아직 가난한 나라였을 무렵,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도로나 상하수도, 상업시설, 교육시설 같은 도시기반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허허벌판에 대규모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건설사는 아파트를 지으면서 아파트 단지 내부의 도시기반시설을 함께 짓는 것으로 아파트의 상품성을 확보해야 했다. 정부에서 책임져야 할 대규모 택지조성이나 사회기반시설 건설의 책임을 민간건설회사가 나누어 맡아서 진행하게 된 것인데, 그 결과 아파트 단지 내부는 아파트가 아닌 단지 바깥 동네보다 한결 살기 편한 환경이 되었다. 그리고 아파트의 상품성을 지키기 위해서 아파트 단지는 폐쇄적으로 운영되게 되었다. 바깥과 구분되는 폐쇄적 공동체(gated community)가 된 것인데, 어찌 되었든 이름에 대문(gate)이 들어 있으니 대문을 힘을 넣어 디자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배경에서 갈수록 고급스럽고 화려해지는 아파트 단지의 대문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계급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고 공간 구분에 따르는 계급 구분의 작동이 약해지는 와중에 (시장, 국회의원, 대통령이 일을 하는 곳까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는 추세), 정작 공간/계급 구분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발견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꼬마 아이들 사이에서 아파트 단지별로 친구를 가르고 구분한다고 하니, 계급 차이를 공간이나 장소의 구분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원초적인 본능인지 알겠다. 


아파트 단지 대문과 함께 경계의 존재감을 내세우는 또 다른 사례는 클럽이나 술집 같은 ‘노는 곳’으로 연결되는 문이다. 사무실 같은 일터로 연결되는 경계는 말랑해지는데 비해 ‘노는 곳’으로 드나드는 경계는 갈수록 딱딱해지고 있다. ‘신나게 노는 곳’일수록 그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비일상적으로 화려하고, 통로 끝의 문은 크고 묵직하다. 문 근처에는 건장한 문지기가 있어서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노는 곳’으로 들어갈 때는 경계를 통과하는 것부터가 즐거운 일이기에, 통로와 문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경계를 통과하는 체험’부터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일하는 곳’으로 들어갈 때는 경계를 통과하는 것부터가 부담스러운 일이기에, 문의 존재를 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다. ‘일하는 것’은 일상의 연속이고 ‘노는 것’은 일상에서 격리된 비일상적인 사건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 조각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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