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발행하던 2년 간의 뉴스레터를 그만둔 지 8개월이 지난 이 시점. 제 할 일은 영 못하면서도 하염없이 빠져나가는 OTT 구독료는(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 애플tv, 디즈니플러스) 아직 남들보다 ‘보는 사람'으로서 남고 싶다는 허세와 그쪽 세상과의 마지막 끈 사이 어드메쯤의 역할로 남았다. 읽는 습관을 목표로 각자 매월 책 한 권을 고른다, 읽는다, 월 1회 만난다는 느슨한 규칙만이 있었던 덕인지, 만나서 술과 음식을 더 즐겼던 덕인지, 어쨌든 1년 여간 꾸준히 이어졌던 지인들과의 독서모임도 중단되었다. 간신히 욱여넣던 이야기들이 멎었다. 마감처럼 해치우던 영화와 드라마와 책이 떠난 자리에 무용 공연을 미친듯이 밀어넣기 시작했다. 바닷물에 중독된 사람마냥.
이따금씩 견딜 수 없는 수치와 우울이 오가길 거의 평생 반복하며 남은 건 정기적인 움직임이 얼마나 정신을 붙드는 단단한 근육이 되어주는지 같은 실체있는 교훈. 몸과 마음의 건강의 순서를 따지다보면 의외로 마음은 일정 수준 몸에 귀속되지 않는가? 앉아 일할 팔자인지 신체능력이 상당히 떨어지고 잘하지 못하면 화가 나는 성질머리에도 운동은 즐거웠다. 잘 할 필요 없는 영역이니까. 못하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나만 아는 속도로 느리게 성장한다. 몸은 성과를 내지 못할 지언정 적어도 거짓말 하지 않았다. 연습을 안했다면 안한만큼 티가 나서 적당히 입을 털어 모면하거나 더 나은 상태처럼 절대 속일 수 없다. 정직하다.
다시 태어나면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종종 말한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 난 할 수 있다면 태어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던 선배에게 예?? 왜요?? 되묻던 나도 요새는 그 말을 이해한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빈도만큼 마케터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 위화감을 느꼈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일말의 부채감, 알량한 이상주의, 비대한 자의식에 뿌리내려 무럭무럭 자랐다. 브랜딩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마케팅이 파생되고 확장되고 깊어졌지만 결국 본질은 타겟에게 유무형의 상품을 파는 일. 좋아하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천성 때문에 적성에 잘 맞으면서도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 것을 팔아야할 때가 훨씬 많아서 스스로도 설득되지 않는 거짓말을 지나치게 해왔다. 말로, 글로, 눈으로 사람들을 수시로 현혹시켰다. 아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고 있어. 지나치게 사회 친화적인 내가 되길 요구해. 피로해. 이런 말들이 속에서 차오를 때마다 무용을 보고 싶었다. 올해 들어 더 자주 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이야기 없이 살지 못했던 내가, 내 몸이 본능적으로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럴듯한 말로 이어진 무언가는 완성도와 상관없이 이제 소화되지 않는 불편함에 불과했다. (올 초 초안을 쓰고 결국 발행하지 못한 글은 어째서 내러티브에 매료되어 살 수 밖에 없는가, 인생 전체를 영화적으로 해석하려 하는 자아의 불행함에 대해 나열하고 있어 웃기다.)
올 봄부터 거의 매주, 드물면 격주 공연을 보러다니며 무용에 대한 직업적, 산업적 호기심은 커졌고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듯 한 허기의 자리엔 질문들이 차올랐다. 간만에 찾아온 탐구심에 때때로 잠을 잊었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적절한 상황과 대상을 찾기 전에 새어버리곤 한다. 의식하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혼잣말처럼 뱉는 순간 의의를 다하기도 한다. 다만 화자도 청자도 나여서 약간의 환멸이 찾아왔다. 나로 만족하지 못하는 결핍이 묻어났기 때문이며 선망하는 대상을 마치 흠없는 완벽한 개체로서 신성화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고 완벽히 타자화한 질문은 정말 대상의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지, 대상을 정의내리고 있었던건지 모호하다. 상대를 이해하려 한 질문이 아니라 나를 향한 질문에 가깝다. 간과한 부분은 어쨌든 그들도 직업인이라는 전제. ‘무용’으로 엮인 그들은 다를수도 같을수도 있다. 집단 이전에 개인이니까.
인터뷰어 : 김휴리
인터뷰이 :
1. 무용은 어떻게 시작했나? 보통 우연히, 누군가의 추천으로, 가족 중 무용을 한 사람이 있어서 라고 답하는데 일반인(?) 입장에선 모든 절차가 자연스럽지 않아 점프컷 없이 씬바이씬의 해설이 필요하다. 우연은 어떻게 일어나며, 우연을 이제와 우연이 되게끔 만든 결정적 요소는 무엇이었나?
2. 1번에 이은 질문.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나만이 목적이었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통 사람들은 뚜렷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쉽게 찾아오지 않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주 직업을 바꾸고 싶어한다. 무용에 대한 확신은 언제, 어떻게 찾아왔나. 처음부터 평생 할 생각으로 시작하진 않았을텐데 좋아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인지, 잘해서 좋아하게 된 것인지, 그만두기엔 너무 멀리 와있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건지. 무엇이든 재미로 하던 시기에서 프로의 시기로 돌입하는 과정은 가혹하다. 그럼에도 계속 하게끔 만드는 근간이 궁금하다.
3. 대부분 초등학교부터 코스를 밟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간과 노력 대비 순수 무용수로서의 삶은 그리 길지 않다고 느껴진다. (쓰고보니 직장인도 크게 다를 건 없구나. 살아야하는 날에 비해 금방 수명이 끝난다.) 무용수는 안무가나 교육자로서의 삶(혹은 둘 다일수도) 주로 두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 같은데 나에겐 마치 배우가 각본과 연출을 모두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중 옵션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현대무용은 정해진 안무를 추기보다 스스로의 해석과 표현 역량이 중요한 장르이기 때문에 가능한가? 잘 추는 재능과 잘 기획하는 안무는 내게 각기 다른 재능처럼 보이는 데 무용수로서 일정 수준 수련하다보면 자연스레 모두 갖출 수 있는 역량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잘 가르치는 일에 비하면 하나의 범주로 보이긴 한다.
직장인들도 연차가 쌓이다보면 실무가 재미있어도 필연적으로 관리직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 시기에 변화한 역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여전히 실무처럼 행동하다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게 된다. 한편 의외로 작은 일 하나하나의 완성도를 챙기다가 판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의 재미를 알게되기도 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규모의 기획들. 실무에선 내 몫만 잘하면 되지만 리더가 되면 내가 못하는 영역이 있어도 괜찮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을 붙이면 된다. 적재적소에 재능있는 이들을 발견하고 조합하는 것이 안무가의 재미일 것 같기도. 어쩌면 무대에 서는 무용수로 오래 남고 싶을 거라는 추측도 스포트라이트 아래를 최우선으로 단정한 편견일 수 있겠다.
4. 대중적 이해가 중요하지 않은 창작 영역이면서 관객이 존재해야하는 이중적인 잣대는 예술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관심 속에서, 반대로 과도한 관심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기준을 지키는 방법, 구체적인 경험들이 궁금하다. 무대에 올라 박수를 받는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감각에 중독 되지 않는가? 공연 후 어떤 상태가 되나? 작품을 준비하는 사전 시간보다 오히려 몇 개월 간의 준비가 끝나고 난 후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가는지 사후 시간에 대해 더 듣고 싶다. 평정을 어떻게 지키고 유지하는지.
5. 무용수는 말 대신 몸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영화배우와 닮고 다른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배우도 각각 연기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크게 메소드 연기를 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무용수도 작품의 감정에 일체화해서 몰입하는 사람과 계산하여 연기하는 사람으로 나눠본다면, 보통 어느 비중이 많은 편인가? 무대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몸은 연습한대로 무의식에 가깝게 움직이고 감정에 깊게 몰입한 상태일까, 다음 움직임과 각도, 표정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생각하고 있을까.
6. 안무가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비슷하지만 마치 자유양식으로 추는 것처럼 서로 디테일이 다른 군무를 자주 보는데, 그러한 동작 하나하나도 계산의 결과인가? 아니면 가이드를 받은 무용수들의 창작인가. 후자의 경우 공동창작에 안무가와 무용수들의 이름이 함께 올라가는 경우와 어떻게 다른가?
7. 섣부른 일반화일 수도 있다. 영화, 미술, 사진, 출판, 음악 등 타 장르의 예술인들이 다채롭게 어울리는 데에 비해 무용은 내부 커뮤니티가 강해 보인다. 비전공자가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체육, 클래식과 같은 엘리트 예체능 분야일수록 상대적으로 제한된 커뮤니티 안에서 자라기 때문일까? 의도와 상관없이 이러한 환경이 무용수에 대한 신비로운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 같다. 혹시 무용 외의 환경에서의 삶을 상상해본 적 있을까?
8. 남성 무용수는 특히나 군면제 기회가 주어지는 콩쿨 도전이 치열하다고 들었다. 좋은 의도와 별개로 과열된 콩쿨의 명암이 있을 텐데. 혹은 군대와 상관없이 무용 인생에서 콩쿨은 어떠한 존재인가?
9. 몸을 상시 움직인다는 점에서 건강하고, 자기 세계를 바탕으로 메세지를 던지는 예술인이라는 점에서 민감한 감수성을 지녔을 무용수는 대체로 이 간극 사이에서 어떠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나. 당연히 이 역시 모두 개인의 성향 차이일 수도 있다.
10. 예술적 재능과 인간적 성숙의 상관관계는 있을까? 훌륭한 예술가는 결국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좋은 질문은 반드시 좋은 명제 위에서 발생한다. 는 아마 나의 편향적 확신이다. 관객은 언제나 훌륭한 예술가를 완성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