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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Feb 13. 2019

제주에서, 사소한 삶 - 2

죽어지는 거


친구네 가족이 제주도에 오게 되었다. 여행하러 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살기위해 오는 거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아이와 부부가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내가 그들의 현지인 상담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 사심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가지 사전 정보를 취합해 보건대, 어쩌면 우리 동네가 그들의 새 동네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친구의 직장이 있는 곳과 우리 집은 10분 이내의 거리이고, 인근에 초등학교가 세 곳이나 있으며, 중학교도 지척이다. 새로 조성된 택지지구가 아니라 30년 가량 조용히 고여 있는 동네이므로 도시의 번잡함을 싫어하는 친구 부부에게 추천하기에 적절할 것이라고, 밤새 그럴싸한 핑계거리들을 찾아두었다.


고집하는 주거 형태가 있어?


아니, 그런 거 없어. 아이가 내년에 학교에 가야 하니까 학교만 가까우면 돼. 그리고 전세면 좋겠어. 그런데 제주도는 대부분 연세라지?


그래도 이제는 이주민들이 늘면서 전세도 제법 는 거 같아. 내가 우리 동네에서 좀 찾아봤는데 전세 물건들이 더러 보이더라고. 여기가 교통도 좋고 가까운 곳에 중학교도 있으니까 살기는 괜찮을 거야.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집값은 중요한 이슈였다. 매매 말고 전세 집값 말이다. 내 집을 가질 수 없다면, 그 다음 방안으로 전세만 한 게 없다. 집에다 영혼을 부려 놓을 수는 없어도 몸과 마음을 편안히 부려놓으려면 전세가 필요하다. 요즘은 전세 자금 대출 지원도 제법 잘 돼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제주에는 그 전세가 귀하다. 대부분 연세를 내고 산다. 말하자면, 1년 치 월세를 입주할 때 한꺼번에 치루는 거다. 이제 워낙 육지에서도 많이 알려진 개념이라 제주 이주를 결심하는 이들도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내려온다.

내가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주변의 어른들은 죄다 ‘죽어지는 세’라고 말했다. ‘죽는 세’라고도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귓가에 맴도는 발음대로 검색을 해보았다. 주거 주는 세, 중는 세, 같은 것들로 말이다.


아, 죽어지는 세! 아, 죽는 세! 세를 내는 사람이 죽어나갈 만큼 부담이 되는 세라고! 집주인에게 세를 내고 나면 그 돈은 내 수중에 없는 죽은 돈이라고!


나는 감탄했다. 죽어버리는 세라니.


나이~, 죽는 세 내젠허난 막 조들아졈쪄.
내가 올해 연세를 내려니 조바심이 나서 죽겠다고.


그 말을 못 알아 들었던 시절에는 맞춤하게 리액션을 해주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가슴을 쳐야 하는 대목인데 말이다.



그런 거다. 매해 갱신되는 연세는 사람의 마음을 죽게 만든다. 죽은 (것 같은) 마음을 안고 얻은 집에서 한 해 몸을 누이고 마음을 다독인다. 그래도 서울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그 연세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제주의 집값이 하늘을 날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무튼, 집주인에게 지불하는 동시에 나에게서는 죽어버리는 그 세, 마음을 바짝바짝 타들어가게 해서 결국은 죽어버리게 만드는 그 세. 사실은 그게 세상의 모든 월세를 가리킨다. 다달이 죽느냐, 일 년에 한 번 죽느냐 그 차이일 따름이다.

그래서 친구 부부에게는 전세가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은 게 있다. 전세라는 첫 번째 조건에 선행하는 무엇! 그들은 굳이 제주 옛날 집에 살지 않아도 되고, 아파트여도 되고, 아니어도 되고, 신축 빌라여도 되고, 아니어도 되었는데, 무엇보다 제주다운 동네였으면 했던 거다. 그러니까 제주답다는 건, 산책할 수 있는 거리에 바다가 있거나 오름이 있거나 그러 거겠지. 아니면 하다못해 까치발 같은 걸 들지 않아도 먼 곳의 하늘을 올려다보면 한라산이 통째로 보인다거나. 그런데 우리 동네로 말할 것 같으며, 까치발로 겨우 바라다 보이는 한라산이 전신주와 전깃줄 사이에서 쪼개어져 있다. 한눈에 보이는 것은 새로 생긴 호텔과 오피스텔 같은 거다.


친구의 남편은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혼자서 조천에를 다녀왔는데,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알아버렸다. 그의 마음은 이미 그곳에 전입신고를 마쳤다. 이미 오래 거기서 퍼질러 사는 중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고, 바다가 멀지 않았고, 학원이 많지 않으며, 도시의 번잡함이 스며들지 않았고, 제주시내까지 차로 통근이 가능한 거리의 조천.

그래, 조천이 있었다!


나 역시 한 동안 조천을 그렇게 둘러보고 다녔더랬지. 나의 조건은 바다가 코앞에 있지는 않을 것! 왜냐하면 너무 습하니까. 나는 제주의 습도에 여전히 적응을 못했고, 이걸 견디느라 곧잘 온몸이 아프곤 한다. 대신 창을 열어 까치발을 들면 저 먼 곳에는 꼭 바다가 있을 것! 왜냐하면 나도 그런 풍경을 두고 ‘나의 바다!’라고 말해보고 싶으니까. 나의 배경에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 같은 게 떡하니 있는 그런 일상 사진들을 남겨보고 싶으니까. 그러다가 결국 두 아이의 학교와 우리의 일터와 우리 수중의 돈과 블라블라한 것들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조천, 그래 조천이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알려주기는 싫었던 조천을 그가 벌써 찾아내 버렸다. 이번 판은 어쩌면 뒤집을 수 없는 판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필살기. 통근 시간. 보통 이주민들은 30분 정도의 통근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다. 그게 살다 보면 얼마나 먼 거리인지 깨닫게 될 거라고 나는 내내 얘기했다. 그러나 예정된 실패. 사실상 서울에서 통근 30분 거리란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친구의 남편은 대화를 좋아하는 남자다. 그는 긴 대화 끝에 말했다. 일 년쯤 조천 같은 곳에 살아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요. 그 얘기를 남겨두고 다시 전 날에 마음에 담아둔 집을 보러 가야겠다며 조천으로 떠났다.
나는 눈치가 없는 여자다. 아니 미련이 많은 여자다. 그가 간 뒤에도 우리 동네의 전셋집을 열심히 뒤졌다. 조천을 2%쯤 닮았다고 우겨볼 수 있는 곳을 찾고 또 찾았다.



다음 날, 친구 부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을 구했단다. 조천에서. 사진도 한 장 보내왔다. 예쁜 집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집. 찾으면 있기야 하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옵션을 고루 채울 수는 없었을 거다. 친구 남편이 찾아낸 집은 조천초등학교와 조천중학교가 멀지 않았고, 바다가 가까우며, 마당이 있고, 세 식구가 모여 지낼 수 있는 거실이 넓은 그런 집이었다. 단점이라면 다만 친구가 다닐 직장이 멀다 뿐이었다.  


그런데 그 집은 결정적으로 전세가 아니었다. 조천의 연세는 아직까지는 서울의 월세에 비해 감당해볼만 한 수준이긴 해도 아무튼 죽어지는 세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그런 집이었다.

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든 서울에서든, 지방 소도시에서든 대도시에서든, 우리에게 놓인 삶의 선택지는 매우 척박하다. 가령 친구 부부에게 놓인 선택지란 이런 거겠지.
풍경과 더불어 죽을래? 편의와 더불어 죽을래?
어쨌거나 우리는 ‘죽어지는 거’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므로 그 질문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겠지.
풍경과 더불어 살래? 편의와 더불어 살래?
친구 부부가 택한 것은 앞의 것이었다. 풍경과 더불어 죽고, 풍경과 더불어 사는 것.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먹고 사는 일은 서울에서 먹고 사는 일이나 대전에서(대전에서는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먹고 사는 일이나 비슷할 거다. 그런 일에는 대부분 낭만이 없다. 그래서 애써 낭만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을 소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도시 어디에선가는 너무 크지 않은 볼륨으로 음악을 틀겠지. 손바닥만 한 야경이라도 갖고 싶어 조금 더 큰 빚을 내서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아파트를 고르고 또 고르겠지. 그리고 풍경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 이를 테면, 제주에 사는 어떤 사람들은 창문의 커튼을 열어 바다를 불러들이겠지. 친구 부부가 우선 연세를 감당하는 것으로 제주 풍경을 마당 근처에 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제주다움의 요소들이 그들의 고군분투에 어떻게 응답하는지, 그 응답에 또 그들의 삶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그런 것들을 관찰해 볼 작정이다.



사실 어차피 어디도 천국이 아닌 바에야 죽어지는 무엇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살아봐야만 하는 세상에서 사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죽는 세’를 내고 자기 생을 산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서로의 죽는 세를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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