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너희들이 곁에 있기에
웃긴 일이다. 출근을 할 때는 그렇게도 아침 7시에 눈을 뜨기가 힘들더니, 아침잠이 많은 내가 새벽 5시면 동그랗게 눈을 뜬다. 한 번 눈이 떠지면 천장의 벽지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커튼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에 털끝이 곤두선다. 어딘지 각성되어 있는 듯한 기분에 늦장을 피우는 일이 없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가 있는 걸까.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영문도 모르고 엉겁결에 몸이 부지런해진 이유로 나는 아침부터 사부작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불 밖을 나오면 제일 먼저 창문을 연다.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을 맞이하는 것이 시작이다. 초여름의 느슨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이 창을 너머 방안으로 빠르게 스민다. 방 안에 비스듬히 사선형의 그림자가 진다. 그림자는 침대와 나무책상을 가로질러 부엌 옆에 놓인 화분에까지 가닿는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아끼는 노래를 틀어두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아침 요리를 시작한다. 참, 요리를 하기 전에 미리 세탁기에 밀린 빨랫감을 넣어 돌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국을 끓이는 동안 좋아하는 찻잔에 차를 우려 마시고, 분리수거를 정리하며 소란스럽게 집 안 곳곳을 청소한다. 한참을 부산스럽게 집안일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니,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침대보 위에 두 고양이가 나란히 얼굴을 맞대고 자고 있다. 두 녀석의 작은 몸통이 숨에 따라 봉긋 솟았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한다. 열심히 땀을 흘리는 살림의 현장 한가운데에서도,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저 두 마리의 고양이들이 깨지 않길 바라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침대보 위에서 곤히 잠든 두 고양이, 망고와 나나는 내가 서울숲 쇼룸에서 일하던 시절에 옆 건물의 컨테이너 창고에 길고양이가 낳고 간 아이들이었다. 처음엔 4마리의 형제가 있었지만 언제부터 한두 마리씩 안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두 마리 만이 씩씩하게 살아남았다. 근처에 사는 모든 가게 사장님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밥과 간식을 가져다 바치며 사랑과 정성으로 공동육아를 했다. 엄마가 좋은 자리에 터를 잡고 가는 바람에, 두 녀석은 가게사장님들 뿐 아니라 서울 숲을 오가는 연인들과 가족들의 사랑도 받았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이 녀석들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법이 없었다. 때론 뻔뻔함이 사랑을 받는 탁월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두 고양이의 당돌함과 뻔뻔함은 더 많은 츄르를 불러왔다. 사랑받는 법을 알고,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
두 녀석은 종종 내가 근무하던 쇼룸으로 들어와 한참을 놀다가 자고 가곤 했다. 어느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매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출근과 동시에 문을 열어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두 녀석이 뛰어들어갔다.
아이들이 4개월 차 넘기고 있을 때, 동네의 대장고양이가 아이들의 집으로 와서 음식을 뺐어 먹고 아이들을 헤치고 가는 날이 빈번해졌다. 아이들이 다리를 절거나 피를 보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몇 번의 병원신세를 지면서 모두가 누군가 이 아이들을 입양해 가길 바랐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 제가 데려갈게요.
결국 내가 무턱대고 용기를 내버리고 말았다.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았다. 완벽히 감정적인 결정이었다. 이미 정이 많이 들었던 터라 이 아이들이 다치도록 더 이상 놔둘 수는 없었다. 모두가 내심 내가 데려가주길 바란 모양이었는지, 그제야 잘되었다며 속마음을 내비쳤다. 가게 사장님들도 아이들이 이미 내가 근무하던 쇼룸에 자주 들락거리는 것을 본터였다.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면 함께 기뻐해주었지만, 나는 얼떨떨하게 웃었다. 아이들을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은 확신보다는 객기,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하게 나의 작디작은 집으로 두 아이를 데려와버렸다. 내 몸하나 잘 보살피지도 못하는 내가 어쩌자고 얘네를 데려왔을까. 아이들을 데려온 그날 나는 한 마리씩 번갈아가며 아이들을 씻겼다. 맨날 붙어있던 터라 한놈만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면 밖에서 기다리는 아이가 세상 떠나가라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참 난감했다. 문 밖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욕실에서 차분하게 씻고 있던 아이마저 그 울음에 화답하듯 앵앵 울어대는 것이다. 화장실의 안과 밖에서 두 고양이가 번갈아가며 울어대니, 다른 집에 피해가 될까 식은땀이 흘렀다. 그럴수록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고 아이들의 몸에서 나오는 때구정물이 빠지는 것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날은 전쟁통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얘네를 데려왔을까’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다 씻긴 두 아이들 미리 사놓은 고양이집에 폭신한 방석을 깔아 함께 넣어놓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게 서로의 털을 핥아주기 시작했다. 고롱고롱 소리와 함께.
그렇게 이 녀석들을 씻고 먹이고 보살피며 함께하면서 보낸 몇 개월. 집에 머무르는 찰나의 순간순간마다 이 녀석들이 내게 가져다주는 묘한 감정들은 마치 내가 아이들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특히나 요즘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실패감과 후회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나에게는, 아이들이 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하람 작가님의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세요」에서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나면 그를 만나러 가는 길가의 바람과 나무와 모든 풍경이 되려 자신에게 선물이 되어 다가온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 겪는 모든 과정이 결국 자신에게 선물로 돌아오는 행위라고. 우리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 누군가에게 꽃을 전해주면 마치 내가 꽃을 받은 듯이 행복해지고, 좋아하는 향의 바디워시를 선물하면 내 마음도 한결 개운해진다. 선물을 하는 것은 곧 선물을 받는 것이라는 걸 정의해 준 그 책 속 문장이 좋아 나는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나는 망고와 나나를 보살피며 매일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
나의 하루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망고와 나나가 있다. 매일 밤 가난한 마음으로 잠에 들더라도 웃으며 잠에서 깰 수 있는 건 모두 이 녀석들 덕분일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 한편에서 두 녀석이 고롱고롱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물이 가득 든 금고의 거저 연 듯한 기분이 든다. 세상에 이보다 더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을까. 너희 덕분에 이렇게 나는 노력도 없이 행복해진다.
그러니 나는 아이들이 준 이 기운을 가지고 씩씩하게 하루를 산다. 혼자도 버겁다던 나의 삶을 두 녀석은 바꾸어 놓았다. 너희들이 내게로 와줘서 나는 더 이상 내 삶이 버겁지 않게 되었다. 심각하고 진지한 것은 쓸모없다. 적어도 너희들 앞에서 만큼은. 그러니 언제까지나 바보 같기를. 지금처럼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