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웃으며 기억하게 될 일일뿐
동생이 잔다. 책상에 앉아 동생이 가지런히 잘라준 멜론을 먹으며 미리 신청해 두었던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으니, 하루가 대단치 않게 마무리가 되는 듯하다. 별 일 아니야. 하마터면 나의 홀로서기가 시시하게 완성될 뻔했어. 애써 쿨한 척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괜찮아 괜찮아를 되뇌었다.
몇 달을 발품을 팔아 찾은 오래된 상가가 있었다. 후미진 골목 모서리에 위치해 있던 그곳은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피아노 학원이었다고 했다. 골목 모서리에 위치한 피아노 학원 상가는 전면이 통유리인 것도, 상가 안쪽에 작은 방과 화장실이 딸려 있다는 사실도, 무엇하나 매혹적이지 않은 요소가 없었다. 모든 게 첫눈에 맘에 들었다. 외부공간은 책 소개 공간으로, 안쪽은 모임공간으로 쓰면 좋겠다는 그림이 한눈에 그려졌고, 미닫이형태의 나무문과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옛된 느낌이 좋았다. 책방이름을 <게으른 정원>으로 지은만큼 유리창 앞으로 작은 화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설렘에 마음이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상가 안쪽의 문은 건물주 할머니의 주택 마당과 이어져 있었는데, 마침 상가를 보러 온 젊은 처자가 있다는 소식에 주인 할머님이 집 밖으로 나오셨다.
- 아유 예뻐라, 손녀딸 같아.
할머님은 나를 보자마자 와락 안으셨다. 나를 안은 것은 분명 할머님이었지만, 체구가 작은 탓에 내가 할머니를 안은 것 같이 어정쩡하게 섰다. 순간 나는 속절없이 이 공간이 좋아져 버렸다. 공간을 직접 설명해 주시는 할머니의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불현듯 ‘할머니도 늘 혼자 식사 실 테니, 종종 할머니랑 같이 밥 먹어야겠다!’라는 생각마저 해버렸다. 고작 10분 전에 처음 본 이 공간이 내 마음을 완벽하게 비집고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 후 나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상가가 음료를 파는 것이나 책방으로 운영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지 시청과 몇 번이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통을 했다. 신축 건물 상가의 경우, 부동산에서 대략적인 정보를 다 알아봐 주지만 내가 알아본 구도심과 같은 경우는 대부분 재개발을 목적으로 두고 있어서 나 같은 상가 임차를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을 크게 반기지 않았다. 알아서 알려주기를 기다렸다가는 세월아 네월아 하염없이 시간이 흐를 수 있으니, 건물 사용에 대한 것들을 하나하나 직접 알아봐야 했다. 시청 정화조가 내가 사용하려는 용도에 합당한 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 상가건물이 여전히 상가용도로 사용이 가능한지, 시청과 세무서를 왔다 갔다 하며 2주 정도를 보내고 내부 구조를 어떻게 배치할 건지를 섬세하게 계획해 나가기 시작했다. 창업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것이 다 처음이라 순탄하지 않았고 틈틈이 외로웠지만, 빛이 환하게 들었던 골목 모서리 피아노 학원 상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환해졌다.
하지만 본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지 않던가.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러 가려던 그날 아침, 급히 부동산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아가씨, 어쩌지. 거기 계약 못한대. 건물주 할머니 따님 명의로 되어있는데, 지금 보유하고 있는 건물이 많아서 세금 때문에 상가로 내놓을 수가 없다네? 창고로 써야 한다네. 어쩌지.
그 후 며칠 동안 할머니의 따님과 통화해 가며 그 공간을 잡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그 상가를 계약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아주머니의 단호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 포기해야 했다. 나는 고백을 거절당한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감정을 느꼈다. 은행에서는 대출이 안된다더니. 이번에는 상가 계약도 안된대. 뭐 하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다.
그날 저녁, 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우리는 보쌈을 시켜 맥주 한 캔과 함께 배부르게 먹고 침대에 함께 늘어졌다. 뻗어버린 우리 사이로 망고가 폭 들어와 앉았다. 배가 부른 데다가 고양이 체온까지 더해지지 졸음이 쏟아진다. 동생은 금방 잠이 들어버렸고, 창 밖으로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나는 홀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래, 차라리 잘 된 일이야. 그 공간은 내 연이 아니었던 거야. 괜찮아. 몇 달 뒤에는 웃으며 이야기하게 될 거야. 때마침 블루투스 스피커로 Racheal yamagata의 something in the rain 노래가 흘러나온다. Something, in the rain. 오늘은 이 음악에 기대어야겠다. 분명 지금 이 순간, 창 밖으로 내리는 이 빗 속에 무언가가 있기를. 무언가가 내게 일어나고 있기를. 지금은 한없이 고달픈 일만 연속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웃으며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속에 박힌 달콤한 초코칩처럼, 안개 속에 가려진 별빛처럼 오늘의 일들이 제 나름의 반짝임을 가지고 내 삶에 박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