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이 안된대

돈 앞에 선 나는 힘이 없었다

by 차차


- 밀크 아인슈페너 한 잔이요.


카페에서 최고로 단 음료를 주문했다. 단걸 잘 먹지 못해서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메뉴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충분한 당을 섭취해야만 했다.


주문을 하고 넓은 타원형의 테이블에 앉았다. 사장님이 친절하게 가져다주신 아인슈페너의 봉긋한 크림을 보니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지만, 바로 옆 한켠에 올려둔 대출 심사 서류를 보니 금세 코끝이 아파왔다. 대출 서류 위에는 은행직원이 이리저리 휘갈겨 놓은 볼펜자국이 남아있었다. 알아보기도 어려운 그 낙서가 하는 말은 ‘대출불가’였다. 현재로서는 내가 무직자인 이유로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코끝이 찡했다.



신용등급 2등급에 청년이면 어떻게든 대출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순진했다. 대출을 받으려면 대출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안정적인 고정소득이 있다거나 담보를 잡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즉, 나는 회사를 나오기 전에 대출을 받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만 해도 내가 창업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여태껏 서른이 다 되어서 이런 것도 모르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때 카페 문을 열고 동생이 들어왔다. 동생은 무심하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킨 후 내 앞자리에 마주 앉았다. 제현이는 나의 유일한 여동생이다. 우리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 어렸을 때는 서로를 죽일 듯이 몸으로 싸웠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몸대신 말로 싸웠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성가시게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기에 붙어 있는 것이 익숙했고, 떨어져 있을 때는 살뜰히 챙겼다. 여행이라도 간다 싶으면 꼭 서로에게 편지를 써주곤 했다.



같은 배에서 나온 두 자매의 성향은 완벽하게 달랐다. 제현이는 현실적이고 나는 몽상가에 가까웠다. 제현이는 규율을 지켜야 하는 일을 했고, 나는 규율을 깨야하는 창의적인 영역에서 일을 했다. 완벽하게 다른 우리였지만, 우리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가족사가 있다는 것과 어린 시절부터 둘이 붙어지내 온 시간이 끈끈하게 우리를 지탱했다. 동생과 나는 엄마에게도 못하는 고민상담을 서로에게 했고, 어떤 주제에서 만큼은 엄마도 친구도 아닌 서로에게만 솔직할 수 있었다.



내가 이별을 하고 일을 그만둔 후, 동생은 내게 자주 전화를 했고 망고 나나를 보고 싶다는 명분으로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동생이 우리 집에 올 때는 투덜투덜 대면서도 꼭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피도넛을 사가지고 왔다. 나는 동생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저릴 정도로 고마웠지만, 그럴수록 더 뻔뻔하게 장난을 쳤다. 나를 걱정하는 동생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도무지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 은행에서 뭐래?


- … 대출 안된대.


- 어제 알아보던 창업 지원 대출은?


- … 그건 저신용자를 위한 거라 그걸 받으려면 차라리 신용이 낮아야 한대.



동생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기보다는 내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봇물 터지듯 입을 열었다.



- 있잖아. 은행에 앉아 있으니 무력감이 들더라. 내가 너무 작아지더라고. 은행한테는 내가 그냥 무직자인 거야. 내가 지금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은행이 보기엔 얘한테 뭘 믿고 대출을 해주겠냐 이거야. 대출을 하려거든 회사를 다녔을 때 해야 되는 거였는데. 왜 나는 그런 것도 몰랐을까. 나 이제 어떡하지? 대출이 안된다면 나가 가진 돈으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져. 바보 같지 나.



동생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동생의 침묵에 사뭇 멋쩍어진 나는 동생 앞에서 이러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터졌다. 한때 내가 갓 취업을 했을 때, 취준생이던 동생에게 한 달에 오만 원씩 용돈을 주곤 했었다. 그랬던 동생 앞에서 이러고 울고 있는 언니라니. 자존심도 상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다 다시 눈앞에 놓인 서류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대출을 떠올리니 다시금 막막해져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똑똑 흘렀다. 그러다 ‘이 언니 어쩌냐’하는 표정으로 맞은편에서 나를 보고 있는 동생을 보니 또 우스워 풉하고 웃어버렸다. 마침내 동생이 입을 열었다.



- 언니 영화 조커 봤지?


- 응? 응.


- 언니 지금 딱 지금 조커 같아. 너무 무서워.



나는 그 말이 또 뭐가 우스웠는지 꺄르르 웃음이 터졌다. 동생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우리는 그냥 웃었다. 웃자. 지금으로서는 웃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동생은 앞으로도 이보다 더한 일도 있을 것이라며, 대출은 방법이 있을 거라며 나를 다독였다.



본격적으로 상가매물을 보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대출을 알아보면서 나는 허허벌판에 핀 들꽃이 된 기분이었다. 이쁘게 피워보고 싶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처음 겪어보는 현실의 매서운 바람이 분다. 현실은 돈과 직결이 된다. 돈 앞에서 나는 힘이 없었다. 이제 알았다. 이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별의 아픔보다 잔인한 것은 현실이란 벽을 넘어가는 것이었네. 아침마다 마음을 다잡고 호기롭게 집을 나서면, 현실에 한풀 꺾인 마른 가지가 되어 들어오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큰일이다. 앞으로는 더한 일도 많은 텐데. 나 무사할 수 있을까.



이후 대출은 공무원이었던 동생의 이름으로 받았다. 나는 그 돈으로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책방을 연지 꽉 채운 2년이 지나 동생의 대출을 갚았다. 2년 동안 동생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생은 앞두고 있던 상가 계약이 파기된 날에도 마침 우리 집에 와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돌이켜보면 동생은 내가 혼자 있기 힘든 날마다,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곁에 함께 있어주었다.



우리는 종종 서로에게 말한다. 자매가 아니었으면 우린 절대 친해질 일이 없었을 거라고. 누군가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운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이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하기 때문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성격 때문에 우리가 남이었다면 가까워질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우리가 자매로 태어나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만큼 멋진 일이 있을까. 하기 싫다며 징징 우는 동생을 붙잡고 자소서를 봐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내 동생이 자라 나를 위로한다. 내 평생의 친구를 낳아준 엄마에게도 고마움이 깊어진다. 동생은 엄마가 나에게 남겨준 최고의 유산이다.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해준 일들에 감사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