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살피며 자라는 어른 1
아이를 키우다 보면 40도씨의 미지근함을 맞춰야 할 일이 많다. 신생아 목욕에 적정한 물 온도는 38도~40도. 분유를 탈 때도 너무 뜨겁거나 차게 식어버리지 않게 40도씨의 미지근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보 엄마 시절엔 인간 온도계를 자처하며 적정 온도를 온몸으로 맞추곤 했다. 혓바닥에 살짝 떨어뜨린 분유 한 방울에 데고, 목욕물에 넣은 손등이 푹 익어버린 뒤에야 국민 육아템인 분유포트, 온도계 등의 힘을 빌리게 됐다.
아이가 자란 후에도 미지근함을 맞추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밥과 국은 뜨겁지 않게 식혀 놓아야 하고 아이가 열이 펄펄 끓을 때 40도 정도 미지근하게 데운 보리차물을 챙겨 먹인다. 묵은 피로를 노곤하게 녹이는 더운물 목욕이라던지, 온몸을 덥혀주는 뜨끈한 국의 참 맛을 알기엔 아직 아이들의 살결은 여리고 연하다.
이제는 굳은살이 박인 살갗이 되었지만, 그런 나에게도 40도씨의 미지근함은 필요하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나는 관계의 적정 온도를 맞춘다. 남이 던진 불씨에 뜨겁게 타오르는 일도,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에 찔리는 일도 잘 없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무던한 사람'으로 봐주는 이들이 많다.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전시 홍보 프로젝트 미팅에서 한 담당자가 말했다. "레나님은 제가 본 아기 엄마 중에서 가장 여유롭고 평온해 보여요. 원래 성격이 무던해서일까요."
그러고 보니 아이와의 관계도 다를 것 없었다. 육아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마음이 시꺼멓게 타기 전에 찬 물을 붓고, 냉랭해지기 전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아이와 나 사이의 미지근함을 유지해 왔다. 어떠한 관계든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잔잔하게 유지해 왔기에, 예민하기보다 무던한 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질문했던 그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나왔다. "미지근한 거, 그게 제일 힘든 일 아닐까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으려고 계속 예민하게 긴장해야 하잖아요."
미지근하려면 계속 긴장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콕 박혀 하루종일 맴돌았다. 나는 사람들을 무던하게 대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쪽에 가까웠을지도. 처음 만난 사람은 물론 늘 곁에 있던 가족에게도 적정 선을 지키려 했다.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 더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멀어지면 그만일 사람에게 과한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모두 같은 온도에 맞추려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피곤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타인에게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도 아니면서 자꾸만 소진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예민하기 때문에 무던해 보일 수 있었다.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매순간 온 마음을 쏟아 타인과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려 애써왔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꺼내어 만져보지 못했다. 호호 불어 한김 식혀 꺼내고, 또 한김 식혀 여기저기 나르고 다녔다. 무던하게 식힌 마음을 다시 끓이기 좋은 계절이 다가온다. 올 겨울엔 뜨끈하게 데워진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만져줘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