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규범을 따르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근대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약속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법을 따르는 것이 언제나 옳은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질문은 단순히 법을 어길 것인가 말 것인가의 도덕적 선택을 넘어, 법이라는 시스템이 과연 언제나 정의를 대변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심을 내포한다.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계약 없는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진다”고 말하며 국가와 법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법이 개인의 자율성을 잠식할 때 어떤 균열이 발생하는가는 여전히 현대 사회의 난제다.
이 물음은 문화 콘텐츠에서도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대표적인 예가 마블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다. 여기서 캡틴 아메리카는 국제연합 산하의 ‘소코비아 협정’에 서명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초인들이 정부의 통제를 받는 순간, 정의의 판단이 정치적 이해에 종속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이언맨은 협정에 동의한다. 그는 울트론 사태를 통해, 개인의 판단만으로 막대한 힘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단순한 영웅들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하더라도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믿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말했다. 이 쇠사슬이 현대 사회에서는 법과 제도다. 물론 이 사슬은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당함을 고착화하기도 한다.
이 문제의식을 좀 더 전면에 내세워 반복적으로 영상에 옮기는 이가 바로 테일러 쉐리던이다. 감독이기도 하지만 연출한 작품은 큰 평을 받지 못했고 그가 작가로 참여하거나 크리에이터로 제작에 나선 작품들은 좋은 평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시나리오를 쓴 <시카리오> 에서부터 <로스트 인 더스트 -Hell or High Water> 그리고 파라마운트 TV 드라마 <옐로우스톤>,<1883>, <메이어 오브 킹스타운>,<털사 킹> 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를 던진다. ‘법과 시스템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그 외에도 여러 작품이 있지만 인물과 장소를 바꿔가며 보여주는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럼에도 인물을 다루는 능력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분위기, 펀치를 날리는 대사등 어느정도 이상의 퀄리티가 늘 유지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재미는 보장한다.)
테일러 쉐리던의 작품은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갈등이 혼재해 있는 ‘그레이 존 Grey Zone’에 대한 질문이들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법과 정의, 자유와 통제, 전통과 변화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인간적 선택에 집중한다. 이는 미국 문화의 핵심에 있는 개척자 정신과 개인주의, 그리고 그로 인한 폭력과 불평등을 드러내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고발한다. 쉐리던은 절대적 선이나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미국인들이 자유를 지키려는 집착과 동시에 그 자유가 낳은 불안과 모순을 직시하게 만든다.
<로스트 인 더스트 - Hell or High Water> 는 그 질문을 텍사스 황무지에서 체감하게 한다. 대형 은행의 부당한 대출 정책으로 목장을 잃게 된 두 형제는 생존을 위해 은행 강도가 된다. 그들의 행위는 명백히 불법이지만, 관객은 이들을 쉽게 악인으로 단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스템이 이미 그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은 형제에게 아무런 구제책을 제공하지 못했고, 정의는 절차라는 이름 아래 지연되거나 실종되었다.
이 서사는 <옐로우스톤> 에서도 확장된다. 존 더튼은 몬태나의 광활한 대지에서 가문과 땅을 지키기 위해 법을 우회하거나 정면으로 거부한다. “땅은 우리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빌린 것”이라는 신념은, 곧 연방정부와 기업의 개발 계획에 맞서는 반항으로 나타난다. 그 반항은 단순한 불법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법이 간과하는 뿌리 깊은 정체성과 공동체적 기억을 지키려는 사투다.
<메이어 오브 킹스타운> 에서는 부패한 교정 시스템을 배경으로, 제도가 오히려 폭력을 구조화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주인공 마이크 맥러스키는 범죄와 법의 경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지만, 그의 방식은 종종 법의 바깥에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제도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생산하는 순간, 개인은 합법성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균형을 회복하려 한다.
이제 질문을 좀 더 확장해보자. 법뿐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관습도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은 점점 더 정교한 법과 강력한 사회적 합의, 촘촘한 도덕적 기준으로 개인을 관리한다. 이 안전망은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윤리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는 ‘합법이냐 불법이냐’,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라는 이분법 속에서 안도하며, 그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다. 그러나 합법성이 곧 정당성이 아니듯, 다수의 합의가 곧 선(善)은 아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은 ‘합법적’이었고, 맥카시즘은 ‘애국적’이었다. 하이데거가 “법은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때로는 은폐하는 기술”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부르디외는 “관습은 우리의 몸에 새겨진 권력”이라고 했다.
물론 규범을 거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무질서와 파편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유 없는 순응은 무비판적 복종으로 귀결된다. 마블의 시빌 워에서 로저스가 토니에게 던진 말은 이 딜레마를 압축한다. “정부가 틀렸을 때는 누가 그들을 막지?” 이 질문은 단지 국가 권력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회사의 문화, 사회적 터부,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라이프스타일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법과 규범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절대화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우리는 촘촘한 규범 속에서 안도하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이 규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시스템은 정의를 담보하는가, 아니면 지배를 정당화하는가?”
테일러 쉐리던의 캐릭터들은 법과 무법, 전통과 변화의 경계에서 서성인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생존자다.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이나 몬태나의 목장주, 교도소 정치에 휘말린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시스템이 완전하지 않다는 냉혹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불완전함을 넘어서는 선택을 고민한다는 점이다. 법과 관습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루소의 경구를 다시 떠올려 보자.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그 쇠사슬을 무턱대고 끊어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이 사회를 무너뜨리는 반란일 뿐이다.
대신 그 쇠사슬이 옳은가를 끊임없이 묻는 성찰이,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