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할 수 있을까?
정의(正義)
: 올바른 도리.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바른 이치.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언제나 무겁게 다가온다. 만화 속 주인공은 정의의 편에서 악을 무찌르고, 교과서 속 위인은 정의를 위해 희생했다. 정치인은 정의를 약속하고, 언론은 정의라는 말을 헤드라인에 달아 분노를 모은다. 사람들은 정의라는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 익숙한 끄덕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정의라는 단어는 옳음의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불의와 위선, 심지어 폭력을 감추는 경우가 많다. 정의라는 말은 거짓말의 언어로 너무 자주 쓰였다.
플라톤은 정의를 “각자가 자기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였다. 시민은 정치, 여성은 가정, 노예는 노동. 불평등한 질서가 그대로 정의로 불렸다. 정의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권력자에게 맞춰진 옷이었다.
역사 속에서 정의는 의도적인 거짓말로 수없이 쓰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구호는 약탈과 학살을 정당화했다. 종교재판은 신의 정의를 내세우며 권력에 불편한 자들을 제거했다. 유럽 제국주의는 식민지배를 ‘문명화의 사명’이라 부르며 지배와 약탈을 포장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일본 제국은 각자의 정의를 외쳤지만, 그 정의는 전쟁과 학살로 귀결되었다. 정의라는 구호가 커질수록 그 밑에서 울린 것은 고통과 비명이었다. 파스칼의 말은 여전히 진리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정치권에서 정의는 너무 쉽게 동원된다. 서로 다른 진영이 같은 사건을 두고 상반된 정의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정의는 객관적 진리라기보다 정략적 수사에 가깝다. 정의는 토론과 합의의 결과라기보다 정치적 무기가 되어버린다.
대중의 공간에서도 정의는 남용된다. 연예인의 사소한 발언이나 행동 하나가 짧은 영상으로 잘려나가 인터넷을 떠돈다. 곧바로 정의의 법정이 열린다. 댓글 수천 개가 판결을 내린다. “끝났다.” “사과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근거는 무엇인가. 대부분은 단편적인 영상 몇 초, 기사 제목 몇 줄이다. 사건의 맥락은 사라지고, 당사자의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얕은 정보와 즉각적인 감정만으로 정의가 선포된다. 정의는 진실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불편한 맥락을 가려버리는 커다란 장막이 된다.
정보 과잉의 시대는 이 현상을 더 심각하게 만든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뉴스 알림과 수백 개의 숏폼 영상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그 조각난 파편만 보고 전체를 아는 듯 행동한다. 깊이 들여다볼 시간도, 검증할 여유도 없다. 그러나 단편적 정보는 오히려 더 빠른 정의를 가능하게 한다. “봤다, 그러니 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정의라는 말은 이렇게 허약한 근거 위에 세워진다.
칸트는 “네가 행하는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의 정의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짧은 영상 하나, 캡처 한 장으로 단죄가 내려진다. 그 순간의 정의는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집단의 감정과 편견일 뿐이다.
니체는 정의를 권력의 산물이라 했다. 강자의 정의는 질서를, 약자의 정의는 저항을 외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정의는 권력자의 독점물이 아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순간 판결자가 된다. 댓글창은 법정이 되고, 좋아요와 공유는 배심원의 표가 된다. 그러나 그 판결은 언제나 다수의 감정에 좌우된다. 다수의 정의가 곧 진리인 것처럼 착각되지만, 실제로는 힘의 우세가 만들어낸 목소리일 뿐이다. 정의는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면으로 전락한다.
현실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정치인의 발언은 진영에 따라 완전히 다른 정의로 읽힌다. 언론은 같은 사건을 두고 상반된 정의를 말한다. 연예인의 과거 발언 하나가 뒤늦게 퍼지면, 십 년 전 농담조의 한마디도 오늘의 잣대로 단죄된다. 학교 단체 대화방에서는 부주의한 말이 캡처되어 퍼지고, 당사자는 설명할 기회조차 없이 ‘문제적 인물’로 낙인찍힌다. 직장에서는 상사의 한마디가 잘려 전해지며, 갑질이라는 정의의 이름이 붙는다. 물론 실제로 잘못된 경우도 있지만, 충분한 검증 없이도 정의라는 말은 너무 쉽게 던져진다.
하버마스가 말한 ‘합리적 담론의 장’은 이렇게 무너진다. 공론장은 합리적 토론보다 속도와 감정으로 움직인다. 누가 더 많은 분노를 모으느냐, 누가 더 자극적인 영상을 올리느냐가 기준이 된다. 그 위에서 정의는 선포된다. 정의가 반복될수록 그 속은 비어가고, 남는 것은 단죄의 쾌감뿐이다.
빠른 정의는 달콤하다. 타인을 단죄하면서 도덕적 우위를 확인하는 순간적 만족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쾌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새로운 사건이 필요하다. 정의는 일회용품처럼 소비되고, 한 번 쓰이고 버려진다. 반복될수록 정의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정의라는 단어는 공허해진다.
무서운 것은, 정의의 언어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방패로 쓰인다는 점이다. “정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보장하는 주문이 된다. 공격은 정의로 포장되고, 피해는 정의의 비용으로 치부된다. 정의라는 말이 남용될수록 불의는 오히려 더 쉽게 숨어든다.
정의의 자리는 높이 세운 깃발이 아니라 발밑의 길이어야 한다. 깃발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길은 사람을 데려다준다. 높은 정의는 집단을 흥분시키지만 낮은 정의는 일상을 지탱한다. 낮은 정의는 단죄보다 대화를, 속도보다 시간을, 확신보다 망설임을 택한다. 망설임은 약함이 아니라 타인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강한 의지다.
정의는 완성되지 않는다. 정의를 정의하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의를 완성하려 하기보다, 정의가 계속 가능하도록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큰 구호를 한 번 덜 외치고, 작은 상황을 한 번 더 살피는 것.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타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는 것.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천천히 묻고, 때로는 단호히 막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면, 언젠가 정의라는 단어가 없어도 정의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오히려 그 반대다. 정의라는 이름은 너무 자주, 너무 가볍게 호출된다. 얕은 정보와 순간적인 감정 위에서 쉽게 선포되는 정의, 집단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방패로 쓰이는 정의, 정치적 무기로만 소비되는 정의. 이런 정의는 진실을 밝히기보다 오히려 진실을 가린다.
정의라는 말은 빛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거짓과 불의가 뒤섞여 있다. 따라서 경계해야 할 것은 정의 자체가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거짓말이다. 그 말이 우리를 위로하는 듯 보이더라도, 그 속에 숨겨진 폭력과 왜곡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정의는 질문일 때 힘을 갖는다. 하지만 답처럼 소비될 때, 그것은 가장 위험한 거짓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