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우리>

나와 너, 또는 나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함께 가리키는 말.


‘우리’라는 말은 참 이상하다. 발음은 가볍고 간단한데, 이 말이 가진 무게는 가볍지 않다. 누군가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그 소리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일종의 신호탄이 된다. 듣는 이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단어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몸에, 마음에 스며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교과서에서도, 뉴스에서도, 정치인의 연설에서도 늘 등장하는 단어다. ‘우리 반’, ‘우리 집’, ‘우리 민족’, ‘우리 국민’. 따뜻하게 들린다.


그러나 동시에 묘하게 불편하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말은 늘 이중적이다.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안쪽과 바깥쪽이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말은 포옹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경계의 언어다. 그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과 밖을 가려낸다. 우리라고 말할 때, 그 순간 이미 너희가 만들어진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이 단어가 가진 양면성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늙은 독일 여성 에미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젊은 이민자 알리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사랑은 사실 특별할 것 없다. 외로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고, 삶을 나누는 과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을 둘러싼 사회였다.


카페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다른 손님들은 갑자기 숟가락을 멈추고, 컵을 내려놓고, 대놓고 그들을 노려본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이웃들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수군거린다. “저 여자가 미쳤지, 저렇게 늙은 여자가…”라거나, “저 남자가 뭘 노리고 저런 여자를 만나겠어” 같은 말들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오간다. 슈퍼마켓 주인은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할까 두려워 두 사람을 내쫓는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문제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이미 ‘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알리는 피부색과 출신 때문에, 에미는 나이와 성별 때문에. 그들은 이미 사회의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난 타자였다. 타자들이 서로를 만나 작은 ‘우리’를 만들었지만, 사회는 그 작은 울타리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그 작은 울타리조차 불온한 것으로 여겼다.


결국 영화의 제목처럼, 불안은 서서히 그들의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단숨에 덮쳐오는 괴물이 아니다. 서서히 파고든다. 처음에는 눈길이 불편하게 다가오고, 다음에는 수군거림이 마음에 남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고.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학 교재에 가깝다. 감정의 교류를 다루것 같지만, 사실은 집단이 개인을 어떻게 압박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배제의 도구로 바뀌는지,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지를 잔인하게 증명한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라는 말은 일상처럼 쓰이지만, 동시에 폭탄처럼 터진다. 좋은 뜻으로 쓰일 때는 아주 따뜻하다. 세월호 참사 직후가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이라고 말했다. 노란 리본이 전국을 가득 메웠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함께 울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라는 말이 진짜로 존재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연대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등장했다.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 “너희는 언제까지 거리에 있을 거냐.” 처음엔 ‘우리’였던 이들이 곧 ‘너희’가 되었다. 분명히 같은 국민이고 같은 사회의 일원이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다. 심지어 단식중인 유가족 앞에서 ‘폭식 농성’이라는 너무나 잔인하면서 동시에 어처구니 없는 사건마저 있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민낯이다.


코로나19 초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이러스라는 정체 모를 공포가 퍼지자 사람들은 갑자기 ‘우리’를 찾았다. 마스크를 나눠 쓰고, 손 세정제를 기부하고, 많은 이들이 의료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이타적인 행위가 신문과 방송을 채웠고, ‘우리의 연대’라는 말이 넘쳐났다.


그러나 동시에 확진자의 동선이 발표되면, 특정 지역이 하루아침에 낙인찍혔다. 어느 건물, 어느 식당, 심지어 어느개인이 ‘너희’가 되는 데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거길 왜 갔느냐.” “저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위험하다.” 연대는 하루 이틀 만에 비난으로 변했고, ‘우리’는 순식간에 쪼개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은 위기 때마다 똘똘 뭉친다.” 고. 맞다. 그러나 그 뭉침이 언제나 포용적인 건 아니다.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본능처럼 안쪽으로 더 밀착하고, 동시에 바깥쪽을 더 세게 밀어낸다. 그 밀어냄은 무심하고도 잔혹하다. 겉으로는 “힘을 합치자”라고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하지만 너희는 빼고”라고 중얼거린다.


이중성은 일상에서도 나타난다. 회사에서 “우리 팀”이라는 말은 협력과 연대를 강조하지만, 그 순간 다른 팀은 경쟁자가 된다. 학교에서 “우리 반”이라고 말하면, 다른 반은 자동으로 적수가 된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우리 집”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 집 바깥은 모두 타자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칼을 품고 있다. 따뜻한 미소 뒤에서 누군가를 베어내는 날이 번득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SNS가 등장하면서 이 현상은 더 노골적이 되었다. 인터넷 댓글창은 새로운 광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끝없이 갈라진 작은 ‘우리’들의 전쟁터다. “우리 편 아니면 다 적”이라는 구도가 댓글마다 선명하다.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말했느냐, 어느 쪽에 속했느냐가 곧 정의다. 한쪽에서 ‘우리’가 정의라 주장하면, 다른 쪽에서는 ‘너희’가 불의라 외친다. 그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어제의 ‘우리’가 오늘의 ‘너희’로 변하는 데 몇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시니컬하게 말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우리’라는 말은 애초에 통합의 언어라기보다 분할의 기술에 가깝다. 마치 잘 만든 화장품 광고 같다. “우리는 아름답다”라는 구호 뒤에는, “그러니 너희는 추하다”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정치인들은 이 기술을 누구보다 잘 활용한다.


연단에 올라 “우리 국민”을 외치지만, 그 말의 숨은 뜻은 뻔하다. “나를 찍는 국민만 우리 국민”이라는 뜻이다. 언론은 이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와 ‘너희’를 갈라놓는 구도는 늘 클릭을 보장하고, 광고 수익을 챙겨준다. 정의로운 분노는 이미 상품이 된 지 오래다.


‘우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사회일수록, 사실은 타자화도 자주 일어난다. 이율배반적이다. 겉으로는 함께한다면서, 실제로는 배제한다. 그 배제의 메커니즘은 아주 정교하다. 마치 잘 훈련된 기계처럼 작동한다.


***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라는 말은 늘 위기의 순간에 빛났다. 전란이 닥치면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지키자고 외쳤다.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며 들고 일어선 것도 결국 ‘우리 땅’을 지키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붙잡아 세웠다.


이런 순간에는 ‘우리’라는 말이 숭고한 울림처럼 들린다. 마치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날, 모두가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매서운 바람을 견디는 장면처럼 보인다. 식민지 시기에도 그랬다. “우리 민족”이라는 말은 억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언어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의 자유, 우리의 독립”을 외쳤고, 그 말이 수많은 청년들을 거리로, 감옥으로,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이끌었다. 여기서의 ‘우리’는 분명 정의로운 것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피와 눈물로 증명된 것이기도 했다.


산업화 시기로 들어서면 ‘우리 국민’이라는 말은 또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정부는 “우리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외쳤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구호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만들었다.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불이 꺼지지 않았던 이유, 시골에서 올라온 이들이 좁은 기숙사에 모여 살며 땀 흘렸던 이유는 결국 “우리 가족”, “우리 나라”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가 놀란 성장 신화를 만들어냈다. 분명 ‘우리’의 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우리’는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개인의 꿈은 종종 사라졌고, 목소리는 억눌렸다.


IMF 외환위기 시기에도 또다시 ‘우리’가 불려 나왔다. 금모으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국민들이 너도나도 장롱 속 금반지를 꺼내 들고 은행 창구에 줄을 섰다. “우리 나라를 살리자.” 감동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시니컬하게 보면, 정작 위기의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빠져나가고,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모든 짐을 짊어졌다.

‘우리’라는 단어는 위기를 극복하는 동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책임을 전가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역사가 늘 밝은 장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듯, ‘우리’ 역시 언제나 순수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반공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우리 국민을 지킨다”는 명분은 곧 “너희 빨갱이”를 색출하는 잣대가 되었고, 이웃이 하루아침에 적으로 규정되었다. 제주 4·3의 희생자들, 여순 사건의 피해자들, 그리고 군사정권 아래에서 시위에 나섰던 청년들 모두가 ‘우리 국민’에서 배제되며 침묵과 죽음으로 내몰렸다. “우리의 안보”는 달콤한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짓밟는 구호였다.


이 패턴은 국경을 넘어 세계 어디에서든 반복되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라는 단어가 폭력과 학살의 구호로 변한 사례는 무수하다. 나치 독일은 ‘순수 아리아인’을 내세우며 유태인을 비롯해 장애인, 동성애자를 철저히 배제했다. 처음에는 법적 권리를 박탈했고, 이어 직업과 거주, 학교에서 밀어냈으며, 끝내 강제 수용소와 가스실로 몰아넣었다. ‘우리’라는 구호가 순식간에 죽음의 명령문으로 변한 것이다.

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라디오가 매일같이 “우리 후투”를 외쳤다. 그 순간 투치족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라 “바퀴벌레”로 불렸다. 언어가 곧 무기가 되었고, 불과 100일 만에 약 80만 명이 살해되었다.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살육의 신호탄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참극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민족과 종교의 선을 기준으로 ‘우리’가 규정되는 순간, 같은 동네에서 함께 살던 사람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었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수천 명이 학살된 비극은, 전쟁이 총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고 너희는 저렇다”라는 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렇듯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장면에서도, 세계사의 참극 속에서도, ‘우리’라는 단어는 숭고함과 폭력, 연대와 배제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깃발 아래 모인 자들에게는 뜨거운 힘을 주었지만, 깃발 밖에 남겨진 자들에게는 차가운 낙인과 죽음을 안겼다. 그리고 그 이중성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

‘우리’라는 단어는 언뜻 보면 따뜻한 담요 같다. 추운 겨울날 덮으면 안심이 되고, 잠시나마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담요에는 실밥이 군데군데 터져 있고, 그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든다. 담요에 들어온 이는 따뜻함을 느끼지만, 담요 밖의 사람은 더 차갑게 떨게 된다. 결국 ‘우리’라는 말은 포근함과 동시에 냉혹함을 함께 품고 있다.


문학은 오래 전부터 이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그 대표적 사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이 역설적인 문장은 곧 ‘우리’라는 말의 본질을 보여준다. 모두를 포괄하는 듯 보이는 구호는 결국 안과 밖을 나누는 장치가 된다. ‘우리 동물’이라는 깃발 아래에서도, 사실은 몇몇이 주도권을 쥐고 나머지를 배제한다. 오웰이 그린 돼지들의 교묘한 언어놀음은 지금 우리의 뉴스, 우리의 정치 연설, 우리의 SNS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불안을 설명했다. 고체처럼 단단했던 공동체가 녹아내리고, 유동적인 관계와 정체성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불안해지고, 그래서 더 작은 ‘우리’를 찾는다. 온라인 커뮤니티, 특정 정치 집단, 심지어 취향 모임까지. 작은 울타리는 안전망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더 많은 ‘너희’를 만들어낸다. 바우만이 말한 불안은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처럼, 결국 영혼을 잠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 ‘우리’라는 말을 아예 버릴 수는 없다. 언어는 삶의 뼈대이고, ‘우리’라는 말이 없다면 인간은 더 큰 고립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가 가진 거짓말을 인식해야 한다. 그 거짓말은 “우리는 언제나 선하다”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우리’는 언제든지 배제와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갈등을 보라.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너희’라고 부른다. 세대는 세대를 향해 삿대질한다. 정치 진영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이 모두가 ‘우리’라는 말의 과잉 사용에서 비롯된 병리다. ‘우리’라는 말은 본래 다리를 놓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더 자주 벽을 쌓는 데 쓰이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이다. 지금의 ‘우리’는 너무 작다. 팀, 학교, 지역, 진영, 세대. 그 울타리는 촘촘하고 배타적이다. 그러나 만약 그 울타리를 조금만 더 넓혀 본다면 어떨까. ‘우리’의 반경을 남녀를 넘어, 세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확장한다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말하는 인류애다.


‘우리’라는 개념이 전 인류로 확장될 수 있다면, 비록 느슨하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속에서야말로 진짜 희망이 피어난다. 그 안에서 더 단단한 작은 ‘우리’들이 계속 생겨나고 강화되겠지만, 그 작은 ‘우리’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울타리들이 전체 인류라는 느슨한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를 적으로 삼지 않고 동료로 바라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여전히 이 언어를 자신들의 편의대로 사용할 것이다. 선거철이 되면 “우리 국민”을 외칠 것이고, 언론은 그 말을 확대 재생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임수를 알아야 한다. 상당수의 정치인이 말하는 ‘우리 국민’은 결국 ‘나를 지지하는 국민’일 뿐이라는 사실을. 언론이 강조하는 ‘우리의 분노’는 클릭과 광고를 위한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정의로운 분노조차 상품화된 세상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결국 최고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래서 필요하다. 더 큰 질문, 더 불편한 질문. “너희는 왜 아직도 거리에 있느냐”라는 목소리에 맞서,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되묻는 것. 작은 ‘우리’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울타리를 끊임없이 흔들어 보는 것. 그 불편한 질문을 던질 때만, ‘우리’라는 단어가 거짓말을 멈출 수 있다.


결론은 서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서정 말고는 대안이 없다. 언어가 벽이 아니라 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인류애다. ‘우리’라는 거짓말이 더 이상 영혼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우리’라는 단어가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거짓된 ‘우리’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