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지 않은 짓의 가치

by 두둥실

나는 누구일까?

단순하면서도 가장 난해한 질문이다. MBTI, 혈액형, 별자리,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밸런스 게임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찾으려 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한 이후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가 ‘나’ 혹은 ‘자아’ 에 대해 질문하고 연구하며 탐구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진정한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확고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짧고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표현이다. 그 중에서도 나의 마음 속은 더 오리무중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걸까 아니면 너무 깊어서 모르는 걸까.


나 역시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나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던 순간이나 경험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 이후로 아주 조금은 나라는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자각은 가지고 있다.

어릴 적 짖궂은 장난은 많이 했지만 막상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석하게 노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 아이였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땀 흘리는 것보다 만화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을 읽는 게 더 좋았다. 집에서 책을 읽거나 비디오를 빌려와 영화를 보고 혼자 기타나 피아노를 치며 노는 시간이 많았다. 여행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가방을 싸고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은 내게 ‘휴식’이 아니라 ‘노동’ 같았다. 사실 나는 게으른 사람이었지만 그걸 일부는 인정하고 일부는 거부했다. “게으름” 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때문이다. 나도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고 싶었다. 나이가 들며 그런 사람이 되려 노력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그 게으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어느 날, 아주 나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 자전거로 세계를 떠도는 여행. 그것도 무려 22개월 동안. 원래의 나였다면 상상조차 못했을 일이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웃으며 말했다.

“제가 게을러서요. 그냥 안장에 엉덩이 붙이고 페달만 밟으면 되거든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 자전거 여행은 단순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아침에 출발해 해가 지면 멈추고, 내일이면 또 다시 밟는다. 어느 날은 산 속이나 도로 옆의 숲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어떤 날은 시골의 허름한 숙소에서 잠들기도 한다. 가끔은 큰 도시에서 말끔한 숙소에서 자기도 하고 낯선이의 선의에 따라 낯선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도 있다.


물론 단순함 뒤에는 약간의 작은 수고들이 필요하긴 하다. 대륙을 건너야 할 때면 자전거를 분해해 커다란 박스에 꾸겨 넣고, 공항 직원과 눈치 싸움을 벌여야 했다. 국경을 넘을 땐 알 수 없는 질문과 자잘한 사건들이 늘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 들어가면 낯선 도로 체계에 당황하고 지도만으론 확인 불가능한 오지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렇다고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양념처럼 곁에 붙은 것들일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불면 고개를 숙이고 더 밟고, 비가 오면 멈춰 기다리거나 빗발을 뚫고 달려나간다. 원래라면 작은 변수 하나에도 계획을 다시 세우던 내가, 길 위에서는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길 위에서의 일상은 의외로 단순했다. 아침이면 안개가 강가를 따라 흘렀고, 저녁이면 붉은 해가 천천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햇볕 아래서 리듬처럼 오르내리는 페달 소리는 하루의 배경 음악이 되었고, 낯선 마을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줄 때면 내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길가에서 건네받은 물 한 모금, 하룻밤 묵게 해준 허름한 방 한 칸은 그 어떤 호화로운 호텔보다 값졌다. 게으른 내가 이 여행을 택한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단순했기에, 나는 끝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사람과의 만남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원래라면 가능하면 피해 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전거 여행에서는 피할 수 없었다. 물을 얻으려면 말을 걸어야 했고, 길을 묻거나 국경을 넘으려면 대화가 필수였다. 싫든 좋든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마도 내게 가장 ‘나답지 않은 짓’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값진 경험이기도 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길 위를 달리며 나는 나 자신을 더 알게 되었다. 수없이 과거와 미래를 떠올렸고, 눈에 담은 풍경과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나를 바꿨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 행복의 뿌리가 그 게으름에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행 중에 나는 등에 타투를 새겼다.

“Yesterday is gone, tomorrow has not yet come.”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결국 충만한 건 지금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저렴하게 새긴 그 타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지고 있지만 그 말의 의미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여행이 끝나고 제주도에 정착해 십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두 가지를 마음에 새겼다. 세상을 알수록 나를 알게 되고 나를 알수록 세상을 알게 된다. 그리고 칸트의 말처럼,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나를 안다는 건 단순히 MBTI 네 글자를 외우는 게 아니다. 나는 세계의 일부이고, 세계는 나의 확장이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게으르게 살고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나의 불안을 요동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어릴 때와 다를 바 없이 내가 원할 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날씨가 좋으면 바다에 뛰어들고 내 마음이 소리를 낼 때는 음악을 만든다. 부와 명예는 없지만 사랑과 여유, 무엇보다 평안이 있다. 내 안에, 내 옆에.


나를 알기 위해서는 때때로 ‘나답지 않은 짓’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강요가 아니라 내 의지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기준과 타인의 시선에 이끌려 ‘나답지 않은 삶’을 산다. 그건 단지 스트레스일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나답게만’ 살면 결코 나를 알 수 없다.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면 결국 자기 자신도 보지 못한다.


자전거 안장에서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때로는 낯선 길 위로 몸을 던져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의 답은, 결국 그 한 발짝 바깥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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