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건 편견이 아니라 편협이다.
편견 偏見
: 공정(公正)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우리는 “편견을 없애자”, “편견은 나쁘다”고 말한다. 아주 쉽게, 누구나.
여기엔 함정이 숨어 있다.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 누구도. 그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편견 그 자체다.
편견이 없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편견이 없는 존재는 그것이 생기지 않을 만큼 지능이 높지 못하거나,
까마득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이거나 할 때나 가능한 말이다.
타고난 기질이 있고, 유아 시절의 경험이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살아온 주변 환경이 있는데
어떻게 편견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편견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이나 마찬가지다.
편견을 멀리하라는 많은 이들의 말은 그 함의로서는 타당하다.
편견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어떤 문제인지 굳이 늘어놓을 필요 없을 정도로).
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그 말로 인해 삶에 많은 오해가 빚어진다.
없앨 수 없는 걸 없애자는 말은 우리를 짓누른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쓸데없는 관심을 돌리는 일들이 생긴다.
진짜 문제는 편견 그 자체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협소한 편견이다(그래서 “편협”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사유 없이 협소하고 똘똘 뭉쳐진 편견은 날카로워서 칼이 되고, 무거워서 철퇴가 된다.
정말 위험한 것은 편견이 아니라 편협이다. 편견은 넓어질 수 있지만, 편협은 스스로 닫힌 채 굳어져 폭력이 된다.
우리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다.
각자의 편견을 최대한 넓히는 것이다.
세상의 서쪽만 보는 사람과 동쪽만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둘은 결코 같이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방향을 바꾸지 못할지라도 그 시야를 넓히고 또 넓힌다면?
360도로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각자의 시야가 180도보다 조금만 더 넓어지면
그래도 두 사람은 아주 작은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다행히도 우리 거의 대부분은 서쪽이나 동쪽 끝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대략 서남쪽, 서북쪽 혹은 동남쪽이나 동북쪽 어딘가쯤을 보면서 살아간다.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다.
전부는 아니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어쩌면 꽤 많이.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경험들을 사유하면서 우리는 편견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해해야만 한다.
편견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편협해지지 않기 위해 편견을 넓히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고도 이성적이다.
나의 편견과 당신의 편견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만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