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힐링(healing)

: 원래는 ‘치유’ 혹은 ‘회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요즘 사회에서는 웰니스, 마음챙김, 리트릿, 숲테라피 같은 말들과 함께 “지친 나를 돌보는 라이프스타일”을 가리키는 유행어가 되었다. 글로벌 웰니스 단체들은 아예 “총체적 건강을 향한 능동적 추구”라는 정의까지 내놓는다. 멋있다. 문제는, 멋있기만 하다는 점이다.


한국은 자살이 뉴스에서 사라질 수 없는 사회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23년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7.3명으로, 전년보다 또 올랐다. 숫자 뒤엔 얼굴이 있다. 누군가는 떠났고, 더 많은 누군가는 “어떻게든 버티는 법”을 배워 하루를 넘긴다. 통계는 차갑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힐링하러 갑니다”라는 문장이 계절 인사처럼 떠돈다.


이제 힐링은 산업이 됐다. 울창한 숲, 하얀 요가매트, 파스텔 톤의 보틀. “나를 돌보는 소비”는 죄책감 없는 지출이라는 안도감을 판다. 마음챙김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존 카밧진은 마음챙김을 “의도적으로, 현재 순간에, 판단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 정의했다. 좋은 말이고, 실제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만 그 말이 앱 구독권과 숙박 패키지를 통과하는 순간, 마음챙김은 기술이 아니라 상품이 된다. 상품은 효과보다 반복을 원한다. 우리는 점차 ‘돌봄’을 구매하고, ‘회복’을 예약한다. 나쁜 일은 아니다. 다만 질문은 남는다. 이게 진짜 치유인가, 아니면 안심을 사는 일인가.


조금 비꼬아 말해 보자. 한국은 ‘사람을 갈아’ 유지해 온 사회다. 천연자원이 부족했기에 사람의 시간, 체력, 성취가 곧 자원이었고, 그 자원으로 세계 10위권 경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성장의 열은 식어 가고, 출생률은 바닥을 친다(2023년 추정 합계출산율 0.7명). 남아 있는 건 ‘더 빠르게, 더 많이’라는 습관과, 그 습관이 남긴 피로다. 피로가 병이 되면 힐링이 시장이 된다. 그러면 피로는 줄어들까? 대체로 아니다. 피로는 다음 달에도 충실히 돌아온다.


이 피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을 보라. 자살률은 한국보다 낮을지 몰라도, 다른 얼굴의 절망이 있다. 2023년 한 해만 약 10만 명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2024년에는 큰 폭으로 감소했다지만(약 27% 감소), 여전히 엄청난 수치다. 숫자 사이를 메우는 이야기들은 비슷하다. 일자리는 불안정하고, 도시는 고독하고, 플랫폼은 시간을 쪼갠다. 내일을 버티려 오늘을 달래는 약이 늘어난다. 한국은 죽음을 통계로 더 많이 겪고, 미국은 산 사람들의 ‘사실상 부재’를 더 많이 겪는다. 두 사회 모두, 시스템이 남긴 피로를 개인의 ‘자기관리’로 떠맡긴다는 점에서 닮았다.


여기서 힐링이라는 말은 총량을 속인다. 좋은 풍경을 보고, 잘 먹고, 잠깐 쉬는 건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 쉼이 다시 “더 많이 일하기 위한 충전”으로만 쓰일 때, 힐링은 치료가 아니라 윤활유가 된다. 불량 설계를 고치지 않은 채 기름칠만 반복하는 기계처럼. 개인은 자기탓을 배우고, 조직은 효율을 챙기고, 사회는 구조를 외면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말한다. “그래도 주말에 힐링하면 되잖아.”


이쯤에서 자주 소환되는 문장이 있다. “‘자기 돌봄’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며, 때로는 정치적 행위다.” 오드리 로드의 말이다. 이 문장이 힐링 산업의 광고 카피처럼 소비될 때가 있지만, 로드가 말한 돌봄은 촛불과 아로마 향이 아니라 공동의 버팀과 존엄의 확보에 가까웠다. 그는 공동체의 차별과 폭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서 ‘돌봄’을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힐링이 있다면, 그 방향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규율의 채찍 대신 성과의 채찍을 든 시대를 진단했다. 금지의 사회는 “하지 마”로 사람을 묶었고, 성과의 사회는 “할 수 있어”로 사람을 소진시킨다. 지시가 줄었는데 피곤은 늘어났다. 왜냐하면 감독은 밖에서 안으로 옮겨 탔기 때문이다. 오늘의 힐링 담론이 위험해지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더 돌보라”는 말은 때로 “더 잘해 보라”는 또 다른 성과 지시가 된다. 실패하면 자기관리 실패, 성공하면 다시 목표 상향. 그 사이에서 힐링은 또 하나의 업무가 된다. (한병철의 취지는 다수 2차 문헌으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힐링은 얼마나 힐링해 주고 있을까? 마음챙김이 우울, 불안, 통증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들이 있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치유의 효과는 개인의 맥락에 따라 갈리고, 무엇보다 원인을 방치한 채 결과만 달래면 재발한다. 야근 문화가 바뀌지 않는데 명상 앱만 늘어나는 풍경이 그렇다. 성과평가의 잣대가 독하게 유지되는데 주말 리트릿만 늘어나는 풍경도 그렇다. 휴식은 예방이 아니라 보상이 되고, 보상은 다음 과부하를 불러온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다. 우리는 힐링을 ‘사후 처리’로 배웠다. 이미 아프고, 이미 지쳤고, 이미 무너진 뒤에야 꺼내는 응급키트. 그러나 어떤 아픔은 응급키트로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다. 사람을 자원으로만 계산하는 회사, 사람을 비용으로만 보는 정책, 사람을 숫자로만 다루는 서비스. 이 구조는 힐링의 반대편에서 아픔을 대량 생산한다. 그러니 묻자. 힐링은 정말 필요한가? 물론이다. 하지만 더 급한 건 힐링이 덜 필요해지는 사회다.


그 사회는 거창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아주 현실적인 몇 가지로 시작된다. 회복을 개인의 과업이 아니라 조직의 의무로 재배치하는 것(예: 예측 가능한 퇴근, 연차의 실사용, 목표의 상한선 설정). 정신건강을 치료 접근성의 문제로 다루는 것(보험, 지역 클리닉, 대기 시간). 플랫폼이 사람의 집중과 수면을 수익 모델로 갉아먹지 않도록 규제와 디자인 윤리를 갖추는 것. 학교와 군대, 회사에서 “한 번 더 버텨라” 대신 “한 번 쉬어라”라는 말이 실제로 가능한 운영의 여지를 만드는 것. 이런 작은 제도들이 모이면, 힐링은 ‘행사’가 아니라 일상적 인권에 가까워진다.


한편으로, 개인의 영역에서도 카피를 덜 믿는 태도가 필요하다. 풍경과 카페인으로 덮는 휴식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를 살리는 쉼과 나를 더 쓰게 만드는 쉼을 가려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영역에서도, 로드가 상기시킨 그 문장을 되돌려 보자. “나를 돌보는 일”은 혼자서 더 잘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살려내는 기술일 때 힘을 가진다. 밥을 나누고, 일을 나누고, 실패를 나누고, 시간을 나누는 구조. 돈처럼 흘러가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회복을 위해 의도적으로 비워 둔 시간. 거기서야 비로소 힐링은 이벤트가 아니라 관계의 온도가 된다.


끝으로, 한 문장만 남기고 싶다. 힐링을 찾기 전에 아프지 않게 사는 법을 함께 발명하자. 힐링을 욕할 필요는 없다. 다만 힐링이 또 다른 과제가 되고, 또 다른 성과가 되고, 또 다른 지출이 되는 순간 멈춰 보자. 지금 필요한 것이 안심인지, 지향인지 묻고, 가능하다면 지향 쪽으로 한 발 옮겨 보자. 그 한 발이 쌓이면, 언젠가는 “힐링하러 떠납니다”가 아니라 “오늘은 굳이 힐링이 필요 없었어요”라는 말이 우리의 일상이 될지 모른다. 그게 진짜 회복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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