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문명 :

인류의 생활이 물질적·정신적으로 발전하여 일정한 질서와 제도를 갖추게 된 상태.

또는 그 상태에 있는 사회.


요즘의 세계를 보면 왠지 종말이 다가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종말은 아닐 것이다. 지구의 종말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연히 자전과 공전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의 종말일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문명’의 종말이다.


뉴스 화면에 흘러나오는 전쟁과 테러, 기후 위기, 그리고 사회 곳곳의 불신과 분열은, 우리가 믿어온 ‘문명’이라는 약속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문명이란 일정한 질서와 제도의 그물망 위에 간신히 세워져 있는 집과 같다. 그 그물이 찢어지면 세상은 곧장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매드맥스 영화 속에서처럼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더 이상 자동차가 아니라 무장한 생존자들의 폭력이고, 법 대신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다.


역사 속에서도 실제로 그러한 순간이 있었다. 미케네 문명이 몰락하고 고대 그리스 문명이 태동하기 전, 우리는 그것을 ‘암흑시대’라 부른다. 글과 기록은 거의 사라졌고, 남겨진 것은 몇 개의 토기 조각과 불타버린 도시의 흔적뿐이다. ‘바다 민족’이라 불린 정체 모호한 무리들이 이웃 국가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렸고, 갑작스러운 몰락 속에서 수백 년간 그리스 사회는 침묵과 공포 속에 가라앉았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글쓰기, 제도, 법, 교역 같은 문명의 기본 요소들이 한순간에 증발했던 것이다.


문명이 무너진 사회는 단순히 불편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기록이 끊기고, 언어가 퇴화하며,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다. 전기가 꺼지고 식량이 끊기면, 인간은 이성보다 본능에 가까워진다. 질서와 규칙이 사라진 세계는 언제든 우리 발밑을 열어젖힐 수 있다. 문명의 빛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는 거듭 증명해왔다.


문명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포장된다. 사전적 정의만 보더라도 문명은 마치 진보와 동일한 듯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참사가 자행되었다. 근대를 기점으로 한 서양 문명의 팽창은 그 대표적 사례다. 유럽 열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며 “미개인을 문명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프랑스는 이를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라 불렀고, 영국은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라는 시구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약탈과 학살, 그리고 노예 무역조차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되었다.


비단 근대만이 아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아즈텍과 잉카 제국을 무너뜨릴 때도 ‘기독교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결과 찬란했던 중앙아메리카 문명은 불과 수십 년 만에 몰락했고 수백만 명이 전염병과 학살로 죽어갔다. 20세기에도 나치 독일은 ‘게르만 문명’의 우월성을 내세워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 제국 역시 아시아를 침략하며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문명적 명분을 내걸었다. 문명은 언제나 빛나는 얼굴로 나타났지만, 그 이면은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문명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여전히 존재한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나 그 나라의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차별적인 언행을 쉽게 내뱉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선의 문명이 서양에 비해 과학기술에서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그 시절 전체를 뿌리째 부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지금의 기준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인터넷, 인공지능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만들어낸 서양 문명과 비교해 그런 것이 없던 우리의 과거를 곧장 ‘불행’하거나 ‘미개’했다고 단정하는 시선은 과연 옳을까?


조선은 과학기술 면에서는 뒤처졌을지 모르지만, 유교적 제도와 사회 질서를 바탕으로 500년 이상 안정된 왕조를 유지했다. 과거제와 교육 제도는 일정한 사회적 유동성을 가능하게 했고, 공동체적 윤리와 향약 같은 자치 제도는 사회적 균형을 지탱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민간 문화의 발달은 또 다른 독창적 성취였다. 이를 단순히 ‘낙후’라 치부하는 것은 문명의 다양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근대화 이전의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사회 역시 각기 나름의 질서와 제도를 갖춘 문명이었다. 그럼에도 서구적 기준만을 절대적 잣대로 삼아 다른 시대와 문화를 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착각이며 오해다.


문명의 이중성은 역사 속 큰 사건들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인터넷과 자본주의로 촘촘히 연결되어, 우리는 어디서나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소비하며, 비슷한 생활 방식을 공유한다. 얼핏 보면 문명은 전 세계를 하나로 통일한 듯하다. 그러나 바로 그 ‘보편적 기준’이 다른 곳에서는 폭력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몇 해 전 라오스의 작은 식당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옆자리 프랑스인 남성은 스테이크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주방장을 불러 큰소리를 쳤다. 값은 파리의 레스토랑보다 훨씬 저렴했는데, 아마도 1/5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문명화된 기준’에 맞느냐였다. 그의 태도는 작은 식당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마치 그 나라 전체를 후진적으로 낙인찍는 듯한 폭력성을 풍겼다. 문명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동일한 문명적 기준이 타인과의 경계에서 갈등을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생각해보면 스테이크는 애초에 라오스의 전통 음식도 아니고, 그 식당은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구적 기준의 ‘정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식당이나 요리에 요구되는 퀄리티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일까? 문명은 언제나 ‘보편적 잣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상 그 잣대는 특정한 지역과 시대의 취향과 권력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문명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억압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또 다른 시선을 더해보자. 최근 서양 사회에서는 채식주의와 비건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환경과 동물 권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종의 ‘문명적 취향’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동양의 많은 나라들은 애초에 육식보다 채식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왔고, 인도는 지금도 채식 인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서양의 일부 채식주의자들은 아시아의 저개발 국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는 모습을 보며 묘한 시선을 던진다. 정작 그들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비만에 시달리거나 건강을 해치는 이유는 자신들의 문명이 만들어낸 가공식품과 식습관 때문이다. 이제서야 거기에서 벗어나 ‘건강’과 ‘지구’를 생각한다며 내세우는 채식이나 유기농 식단은 사실 오래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이어져온 보편적 생활 방식이었다. 자기들이 망가뜨린 것을 문제 삼으면서, 그 영향으로 나쁜 식습관을 받아들인 다른 나라 사람들을 다시 천시하는 태도는 부조리하지 않은가.


문명은 인간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것이 곧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더 크고 빠른 도시, 더 높은 건물, 더 화려한 소비가 곧 문명의 진보라고 착각하는 것, 문명에는 높고 낮음이 있다고 서열을 매기는 것, 문명을 물질적 풍요와 동일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문명의 허구다.


역사가 증명하듯 문명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때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때로는 구속한다. 철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했듯, “문명이란 인간을 교양되게 만들지만 동시에 구속한다.” 문명은 우리를 빛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그 빛에 눈이 멀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문명은 인간이 만든 가장 큰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묶고, 불안을 잠재우며, 살아갈 힘을 얻어왔다. 중요한 것은 그 거짓말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허구임을 자각하면서도 여전히 더 나은 질서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있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매드맥스의 황폐한 세상에서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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