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정상

正常: 이치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보통의 상태.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 속 조나단 리빙스턴은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면서, 무리에게서 쫓겨난다. 모두가 똑같이 바다 위를 선회하며 먹이를 낚아채는 것이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원한 건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다르게 나는 법이었다. 우리 사회의 ‘정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편하고, 무난해 보이고,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 안심은 오래가면 무거운 족쇄로 바뀐다.


정상이라는 말은 원래 의학과 통계의 언어였다. 평균 근처, 건강의 기준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의 방식과 가치 판단에까지 끌려 들어왔다. 정상적인 집, 정상적인 학력, 정상적인 직장과 결혼. 그렇게 하면 실패해도 내 탓만은 아닐 것 같다는 심리. 반대로 비정상으로 보이면 설명해야 한다. “왜 그 길을 택했어?” 궁금증을 가장한 심문이 이어진다. 설명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사람들은 결국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쪽을 선택한다. 무난함은 그렇게 몸에 배어든다.


문제는 이 무난함이 정답으로 둔갑하는 과정이다. 평균이 규범이 되고, 흔함이 도덕이 되며, 효율이 옳음처럼 포장된다. 학교의 시간표, 회사의 보고서,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모두 이 경로를 닦아낸다. 누구도 공식적으로 ‘정상’을 선포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기준이 공기처럼 퍼진다. 그 안에서는 판단보다 적응이 빨라지고, 질문보다 순응이 익숙해진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질문을 잃어버린 정상은 결국 습관만 남는다.


정상이 주는 이점은 분명하다. 빠르고, 편하고, 소속감을 준다.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다양성이 줄어든 사회는 충격에 약하고, 사람은 오답에 대한 내성이 떨어진다. 늘 맞는 것만 고르다 보면 틀렸을 때의 복구가 어렵다. 새로운 길을 낸 사람들은 언제나 당대의 ‘비정상’이었다. 그들의 낯설고 불편한 시도가 시간이 지나 문명의 지형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는 정상은 과연 얼마나 오래 유효할까.


정상은 또 하나의 오해를 낳는다. 정답이 있다는 착각이다. 삶에도 답안지가 있다고 믿으면서, 사람들은 답을 외운다. 이력서의 문장, 소개팅의 대화, 입사 후의 자기소개까지 놀랄 만큼 닮아간다. 합격하기 위한 문장은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지만,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관계도 비슷하다. 정상적인 연애, 정상적인 주말. 무난함은 안전하지만,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둔해진 감각은 새로운 것을 불편해하고, 결국은 반복을 택한다. 다수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옳음을 증명해 주는 건 아니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다수의 편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는 잠시 멈추고 성찰할 때다.” 성찰을 멈춘 다수 속에서 정상은 정답의 표정을 띠고, 생각은 조용히 말라간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거창한 반항이 아니라, 아주 작은 망설임일지도 모른다. “다들 이렇게 산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 한 박자만 멈춰 보는 것. 지금의 선택이 단순한 안심인지, 아니면 스스로 향하고 싶은 지향인지 묻는 것. 이유가 충분하다면 그대로 가면 된다. 이유가 빈약하다면 아주 조금 옆으로 비켜 보는 것. 그 소심한 우회만으로도 정상은 절대적인 답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 내려온다.


부모와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의 길은 단기적으로는 편하다. 줄을 서는 동안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모두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정상과 정답은 엄연히 다르다. 정답은 질문 속에서 발견되지만, 정상은 질문을 지우는 습관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의심하는 태도다. “남들이 하니까”라는 말이 삶의 이유가 되는 순간, 삶은 누군가의 통계에 갇히고 만다.


세상은 가운데를 좋아한다. 가운데는 안전해 보이고, 실패했을 때 욕도 덜 먹는다. 하지만 가운데만 고집하는 사회는 지루해지고, 지루함 위에서는 작은 규범 전쟁이 자란다. 예의라는 이름의 명령이 늘어나고, 대화는 정답 확인으로 좁아진다. 그래서 필요한 건 한 박자의 여유, 아주 사소한 의심, 그리고 자기만의 맥락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정상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점이어야지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금 덜 믿고, 조금 더 의심할 때, 정상은 우리를 가두는 틀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평평한 지점이 된다. 그 평평함에서 숨을 고른 뒤 다시 걸어 나가면, 삶은 더 입체적이고 단단해질 수 있다. 오늘의 비정상이 내일의 상식이 되었을 때, 우리는 웃으며 고백할지도 모른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정상이라고 믿었지.” 그 웃음 속에 약간의 안쓰러움과 약간의 따뜻함이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웃음 너머에선,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가 떠오른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둘을 구분할 지혜를.” 우리의 삶에도 그 지혜가 조금씩 스며들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더 많은 리빙스턴들이 이 사회에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다르게 날고 싶어 하는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포용할 수 있는 사회. 그들을 향한 비웃음 대신 격려가, 배제 대신 환영이 따라붙는 사회. 그런 곳에서야 비로소 정상은 굴레가 아니라, 다양한 비행이 함께 그려내는 넓은 하늘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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