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앎 (명사)

① 아는 일. 지식이나 이해를 갖춘 상태.

②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깨달아 아는 것.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플라톤, Apology)


아이러니한 문장이지만, 인류의 사유를 가장 뿌리에서 흔드는 고백이었다. 그 고백 속에는 인간의 앎이란 언제나 무지 위에 세워진다는 자각이 숨어 있었다. 모른다는 전제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주의 한 조각일 뿐이고, 그나마도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불안정한 지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너무 자주, 안다고 믿는다. 잘 안다고, 확실히 안다고, 심지어 더 많이 안다고. 마치 지식의 무게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안다는 것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베이컨의 말처럼 지식은 힘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지식은 독이 되어 세상을 망가뜨린다. 편향된 정보, 부분적인 이해, 오만한 해석은 사람을 오도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

술자리에서 돈을 많이 번 누군가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의 말들은 경험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험이 곧 지식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다른 이의 삶에 적용되는 순간, 그 지혜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독선으로 변한다. 성공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수없이 본 풍경이다. 그러나 그 성공 뒤에는 알지 못하거나 외면해버린 수많은 운과 환경이 얽혀 있음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혹은 애써 외면한다.


회사 회식 자리에서 부장이 직원들에게 늘어놓는 충고도 비슷하다. 그것은 지식이라기보다, 세월과 권력의 무게가 만들어낸 일방적 목소리다. 젊은 직원들이 속으로 비웃는 이유는, 그 말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말들이 ‘모른다’라는 자리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앎은 언제나 공허하다.


학교에서도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본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어떤 사소한 사실을 말하면, 성적이 나쁜 학생이 똑같은 말을 했을 때보다 더 신뢰를 얻는다. 지식과 무관한 영역에서조차 성적이라는 표식은 앎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성적은 단지 시험의 점수일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지식의 척도로 착각한다.


전문가들의 지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오랜 시간 축적된 학문적 노력과 실험적 증거는 인류가 여기까지 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지식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전문가들의 말은 때로는 매우 제한적이고, 때로는 독선적이다. 과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어떤 시대에 확실하다고 믿었던 진리들은 끊임없이 폐기되어 왔다. 플로지스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 인종 우열론. 모두가 ‘앎’의 이름으로 행세하다 사라진 오만한 지식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전문가의 지식을 존중해야 하는가? 그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계 그 자체를 잊지 않는 일이다. 어떤 분야의 권위자가 다른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말이 가진 한계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의사가 정치에 대해 말하거나, 경제학자가 인간의 심리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경청하되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때로는 지식이 없는 자의 질문이 더 깊은 통찰을 던질 때가 있다. 어린아이가 무심코 던지는 질문이 어른들을 멈추게 할 때가 있다. 어른들은 세상을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이미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이의 단순하고 순진한 물음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 “하늘은 왜 파래요?”, “죽으면 어디로 가요?” 같은 질문은 오히려 지식이 가려버린 세계의 본질을 다시 열어젖힌다. 아이의 무지가 어른들의 앎보다 깊을 때가 있는 것이다.


몽테뉴는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지혜다”라고 썼다. 이 말은 단순히 겸손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무지를 아는 태도는 앎의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다. 무지를 자각하지 않는 앎은 결국 폐쇄된 체계가 되어 스스로를 옭아맨다. 반대로 무지를 인정하는 앎은 언제나 열려 있고, 확장될 가능성을 품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아는 척’이 넘쳐난다. 인터넷은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무지를 가장 쉽게 감추게 만든다. 검색 몇 번으로 우리는 전문가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흉내다. 진짜 앎은 모른다는 자리에 머물며, 그 모름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만 자라난다.


나는 때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름을 껴안으며, 그 모름을 질문으로 바꾸어내는 사람. 그런 태도야말로 진짜 지식인의 길이 아닐까.


우리는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모른다. 아니,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조차 결국은 모름의 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러니를 직시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앎의 오만에서 벗어나, 모름의 넓은 하늘 아래서.

작가의 이전글소속감 : 연대와 맹목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