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ONE BATTLE AFTER ANOTHER

과거의 반성, 오늘의 희망, 내일의 두려움.

by 두둥실

허무함이라는 주 재료에 반성과 비판을 양념으로 사용하고 마지막 한스푼의 희망으로 만들어낸 '시대요리'


공허한 메아리라는 걸 알면서도 "비바 라 레볼루시옹"을 외치고 싶은 나(아저씨)는 영화를 보고 씁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지며 미처 정리되지 않은 것이나마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보면 더 뚜렷해지리라 믿으며)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 카를 마르크스


반복되는 전투, 변하지 않는 세계

PTA가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다. 전투 후 또 하나의 전투. 끝없이 반복되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이 세계는 절망적이다. 실제의 세계도 그렇지만 영화 속 세계는 그 함축판이다. 혁명을 부르짖던 자들은 갈갈이 찢어지고 뒷골목에서 오가는 전설로만 남는다. 과거의 과격했던 전투(혹은 혁명)는 치기 어린 액션 끝에 배신과 죽음의 얼룩만 남기고 시간 속에 묻혀졌다. 누군가는 그저 혁명의 기분에 잔뜩 취했고 누군가는 그런 자의 옆에서 휩쓸려갔다.

영화는 프렌치 75라는 급진 조직의 습격으로 시작된다. 멕시코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을 가둔 곳을 습격하는 그들. 겉으로는 불법 이민자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혁명을 '구실'로 삼을 뿐이다. 이민자들은 '해방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 고유한 목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다. 마치 프렌치 75의 혁명을 위한 소도구처럼.

시간이 흘러도 미국의 국경 장벽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감독이 영화를 구상한 시점은 훨씬 전이었을 텐데도 지금의 미국 현실이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혁명'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증명한다.

(당장 어제 오늘 포틀랜드에 주방위군이 투입되었고 법원에서 긴급 명령으로 그것을 막았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바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불법 이민자 색출과 추방. 영화 속 박탄 크로스의 장면에 오버랩되는 이상한 기시감.)


세 개의 환상, 세 가지 욕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 캐릭터의 서사에서부터 판단할 수 있다.


퍼피디아: 혁명의 짜릿함에 취한 자

피 끓는 혁명 전사인 퍼피디아.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진짜 혁명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오는 짜릿함이었다. 그녀의 치기 어린 행동은 결국 동지들을 파국으로 이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그녀는 너무나 쉽게 동지들의 정보를 록조에게 알려준다. (그 행동이 자신의 남편과 딸에게도 위험이 되리라는 걸 모를 리 없음에도)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잡혀갔다. 남편과 딸은 기약 없는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녀의 모습은 '혁명 놀이'에 탐닉한 자의 비극을 보여준다.


밥: 혁명에 휩쓸린 '부족한' 사람

밥은 그런 퍼피디아의 옆에서 휩쓸려가던 '부족한' 사람일 뿐이었다. 딸이 생기자 더 이상 그의 관심은 혁명에 있지 않았다. 그는 '아빠'로서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정직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는 혁명에 대한 어떤 대의도 보인 적이 없다. 그저 무언가를 터뜨리는 재주가 있었을 뿐. 과거 혁명의 순간에도 늘 소심했고 딸을 가진 뒤로는 너무나 쉽게 그 세계에서 멀어진다. 퍼피디아의 사건 이후 도망가서 십 년이 넘게 흘렀지만 그는 그저 마리화나와 술에 쩔어 사는 한심한 아빠일 뿐이었다.


록조: 욕망에 정직한 백인 남성

록조는 백인 남성의 성공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실제로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신념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흑인 여성을 더 선호한다.) 다만 그 욕망보다 더 높은 자리로 가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클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가장 정직하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이념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충직하게 '시스템'의 명령을 따르며 그 자리로 오르려던 그는 자격 조건에 미달하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제거'당한다.


감독은 묻는다. 진짜 혁명에 관심이 있었느냐고.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냐고. 이상에 들떠서 한 행동이 어떤 변화를 만들었냐고.


진짜 저항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가장 씁쓸한 지점은 세르지오와 그의 마을 사람들이다.

밥을 돕는 무술 선생 세르지오와 그의 공동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담담하다. 그가 무술 선생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그는 그 모든 상황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쳐들어와 최루탄을 뿌리는 순간에도 웃으며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청년들, 지붕과 지붕을 너무나 쉽게 넘어다니는 모습은 그게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밥을 데리고 간 세르지오의 집에서 이민자들을 대피하는 과정을 보면 오로지 밥만 허둥거리고 두려움에 떨 뿐이다. 모두 담담하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들의 주변에 있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세르지오의 집 안에 있는 가족들, 노인과 아이들 모두 그저 식사를 하고 평화롭게 밥과 인사를 나눈다.

밥은 큰 소리로 "비바 라 레볼루시옹!"을 외치지만 그저 허무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세르지오는 그런 밥에게 그저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 맞장구를 쳐줄 뿐이다. 그에게 이 모든 건 혁명이 아니라 하루하루 이어지는 삶이다. 세르지오와 그 마을의 이민자들은 이미 매일을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다. 생존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이 지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이다. '혁명'을 외치던 백인 남성과, 말없이 매일을 저항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대비. 이것이 감독이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다.


착시의 체이스 신: 혁명의 이미지와 실재

영화 마지막 체이스 씬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오르막 내리막을 망원으로 찍으며 부유하는 카메라는 처음 느끼는 긴장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영화의 서사에 함의를 담아낸다. 엄청난 낙차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도로는 일종의 착시일 뿐이다. 실제로 그 길을 달리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 대단한 일을 벌이는 것 같지만 그저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 혁명의 이미지가 혁명 그 자체보다 더 실재적이 되어버린 세계.

그 이상한 길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달린다. 새로운 세대인 윌라. 그녀를 쫓는 크리스마스 모험가(우월한 백인 남성 시스템의 상징).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왕년의 전설(?) 밥.

영화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지만 꽤나 허무하다. 딸을 위해 무언가 한 방을 터뜨릴 것 같던 밥은 결국 시끄럽게 떠든 것 말고는 한 게 없다. 열심히 쫓아다녔음에도 그가 해결한 건 단 하나도 없다.

그 와중에 스스로 싸우고 도망갈 길을 찾은 건 딸 윌라였다. 그리고 마지막 자신을 위협하는 크리스마스 모험가의 멤버도 결국 그녀의 단호한 ‘정지’와 사격으로 마무리된다. 밥이 한 건 때맞춰 도착해 딸을 데려가는 것뿐.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크리스마스 모험가로 지칭되는 '우월한 백인 남성' 모임은 일종의 시스템에 대한 상징이다. 그 시스템은 그대로다. 이 난리통을 겪고 이루어낸 건 그들 중 하나를 죽였다는 것 정도.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표현하자면 시스템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내고 끝난 셈이다. 허무하고 또 허무하다.


냉소가 아닌, 냉정한 시선

감독은 이 반복되었던, 말뿐이었거나, 진정한 목적은 상실했던 수많은 전투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냉정하게, 어쩌면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처음엔 그런 시선이 불편했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팩폭'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 속에도 나름의 진정성을 가진 인물과 서사는 남아 있다. 잡혀가서 끝까지 버티다가 마지못해 정보를 털어놓은 이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했음을 우리는 안다. 누가 그들을 심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을 쉽게 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나약함과 강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나 그 진정성과 그들이 한 일의 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은 대개 약하고 어리석다. 감독은 그것에 불필요한 의미나 동정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다음 세대에게 남긴 것

모든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윌라는 자발적으로 그 혁명의 일부가 되어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뚫고 기어코 모임을 위해서 나가는 그녀를 보며 아빠인 밥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저 나서서 행동했다는 자위에 만족하는 지금의 기성세대에 대한, 스스로를 포함한 통렬한 반성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살아남아야만 이어질 희망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게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이다.

밝은 웃음으로 집을 나서는 윌라를 보며 우리는 기분이 좋아지고 한편 뿌듯해진다. 그녀에게 희망을 건네는 것으로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의 세상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집을 나서는 그날의 날씨 같다고 생각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다. 웃으며 집을 나서지만, 그 빗속에서 무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녀의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어쩐지 걱정스럽다.

윌라는 똑똑하고 강인하지만 그게 다음 세대의 표준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다음 세대가 걱정스럽다. 그들이 기성세대가 쌓아올린 시궁창을 무너뜨리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찾기 힘들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희망은 너무 썩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이 시궁창의 세상이 무너질 때, 그래도 다음 세대가 그 시기를 버텨내고 새로운 세상을 쌓아올리길 바라는 것. 그 정도이다.


균열의 틈새로 들어오는 빛

PTA의 영화 중 가장 재미있지만 가장 씁쓸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절망과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감독이 마지막에 남겨둔 희망은 어쩌면 절망만으로 끝내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닐까? 그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 모든 것이 허무했으므로 그저 인간으로서, 아빠로서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고 헛꿈은 꾸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어차피 미국 덕분에 해방된 건데 독립운동가들이 뭐가 대단해? 그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배신하고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런 말을 듣는 것만 같다.

그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들을 배제한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 레너드 코헨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그 균열이 비록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어리석었고, 자주 실패했을지라도. 그 안에 진심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다만 다음 전투, 다음 세대에게는 거짓이나 위선 말고 그 진심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감독 역시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선사했다고 믿는다.

전투 후 또 하나의 전투. 끝없이 반복되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진실이라는 이름의 거짓이 아니라, 보잘것 없음에도 한발씩 나아가려는 진심이다. 마치 영화 마지막 퍼피디아가 딸 윌라에게 보낸 편지처럼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