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규범(規範)

[명사] 인간이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본보기나 기준.


사전의 정의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인간이 서로를 묶고 단속하며 만들어온 모든 질서의 본능이 숨어 있다. 규범은 법처럼 문서로 적히지 않지만, 그보다 더 깊이 몸에 새겨진다. 어기더라도 감옥에 가는 일은 없지만, 눈총과 비난, 배제라는 더 정교한 처벌이 따라온다. 규범은 언제나 친절한 얼굴을 한 채 등장한다.

배려의 언어로 시작하지만, 어느새 강요의 언어로 굳어지고, “그게 상식이지”라는 말 한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정 짓는다. 법이 인간의 행동을 제한한다면, 규범은 인간의 표정과 온도, 말의 높낮이까지 통제한다. 법이 강제하는 세계가 있다면, 규범은 눈빛으로 작동하는 세계다.


나는 이 규범의 밀도를 여러 나라에서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70여 개 나라를 여행했다. 그중에는 흔히 잘 사는 나라로 불리는 선진국도 있었고, 저개발 국가로 분류되는 곳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선진국보다 저개발 국가에서의 여행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물가와 같은 현실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편안함 때문이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언제나 눈치를 보게 된다. 사회가 고도화된 만큼 지켜야 할 것도 많고, 단순히 법을 따르는 문제를 넘어 에티켓과 매너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무언의 규범이 존재한다. 그 규범들은 표정과 손짓, 말투 하나까지 세밀하게 조율하며 사람들의 행동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둔다.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 그 묘한 압박감이 일상의 공기처럼 스며 있다. 정돈된 도시의 거리 위에서조차 나는 어딘가 불편했다.


반면 저개발 국가에 머물 때는 그 복잡한 규범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

그곳에서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만 어긋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은 차이들은 대체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지고, 사소한 실수는 곧잘 웃음으로 흘려보내진다. 물론 불편함도 많다. 행정은 느리고 교통은 엉망이며, 때로는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느슨한 공기 속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무엇을 하든 누군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도 그것이 곧 집단적 비난으로 번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규칙보다 사람을 먼저 보았고, 상황보다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그 느슨한 질서 속에는, 오히려 인간적인 온기가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곳의 규범은 유난히 도덕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결혼식 하객이 흰 옷을 입으면 안 된다. 뮤지컬 공연장에서 숨소리조차 죽여야 한다. 식당에서는 반드시 1인 1메뉴를 주문해야 하며, 그조차 지키지 않으면 “예의 없는 손님”이 된다.

언제부터 그런 규칙이 생겼는지, 누가 정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키지 않으면 죄인이 되는 분위기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처음엔 ‘매너’였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 하지만 요즘의 규범은 그 배려가 통제의 언어로 변해버렸다. 흰 옷을 입는다는 건 누군가의 시선을 빼앗는 행위가 되고, 공연장에서 기침 한 번 하는 건 예술에 대한 무례가 된다. 여러명이 와서 조금만 음식을 시켜 나눠먹는 건 주인 입장에서 싫을 수 있다. 각자 메뉴를 시켜 먹는게 당연하고 좋은 것이겠지만 이미 식사를 한 사람과 아직 못한 사람이 함께 대화를 하면서 하나만 먹는 건 정말 안되는 걸까? 정말 돈이 부족해서 같이 맛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외식을 하면 안되는 죄인일까? 예의와 배려가 서로를 위로하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그것들은 서로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규범은 언제나 선한 의도를 가장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분위기를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포장은 종종 불안을 감춘다. 누군가 나서서 지적하기 전부터,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속한다.그렇게 규범은 더 이상 사회의 합의가 아니라, 불안이 낳은 자기검열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제주도의 작은 식당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노부부와 아들 부부가 함께 들어왔는데, 이미 저녁을 먹은 아들 부부는 따로 주문하지 않고 부모님만 음식을 시켰다. 부모가 맛있다며 아들에게 맛을 보라 권했고, 아들은 조심스레 수저를 더 달라 했다. 그러자 주인은 얼굴을 옆테이블의 나까지 다 들릴 정도로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 1인 1메뉴인데, 두 분만 시킨 것도 눈감아 준 건데 수저까지 달라니 너무하시네요.”

그 순간 공기가 얼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불편했다.규범은 원래 배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그것은 관계를 끊는 칼이 되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순간,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잃는다.


이 장면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다. 우리는 서로의 ‘옳음’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한다. 규범은 질서를 세우기보다 불안을 재생산하는 기계가 된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말이 도덕의 기준이 되고, “그건 좀 예의가 아니지 않나”라는 말이 사람의 존재를 평가한다.


이쯤 되면 규범은 더 이상 배려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집단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거짓말, “우리는 예의 바른 사회야”라는 자기 암시의 주문이다.

푸코는 감시와 규율의 시대를 말했다. 하지만 오늘의 감시는 더 은밀하다.

우리를 감시하는 것은 법도, 권력도 아닌 서로의 시선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규범을 가장 강력한 통제의 장치로 만든다. 이 감시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 속에서 웃음을 유지하지만, 내면은 점점 굳어간다.


규범은 사람을 지키는 듯하지만, 실은 사람의 자유를 침묵시킨다. 그렇다고 규범이 전부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약자를 돕고, 서로를 배려하자는 마음은 여전히 필요하다. 문제는 그 온도가 지나칠 때다. 배려는 언제나 따뜻해야 하는데, 요즘의 배려는 차갑다. 따뜻함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확신으로 타인을 가르치려 한다.


그 순간 규범은 더 이상 예의가 아니라 권력이 된다. 규범의 가장 교묘한 거짓말은 이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믿게 하는 일. 하지만 그 안전은 보호가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불편한 말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며, 어색한 눈빛을 피하기 위해 웃는다.


그렇게 규범은 사회를 부드럽게 만드는 대신, 인간을 조용히 마모시킨다. 사람들은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점점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말보다 눈치가 앞서고, 진심보다 분위기가 중요해진다. 규범이란 어쩌면 사회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집단적 안심의 이야기가 아닐까. 서로가 불안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조금씩 거짓말을 하는 것. 그 거짓말이 쌓여 ‘질서’가 되고, 그 질서가 다시 사람을 길들인다.


그러나 규범의 목적이 인간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라면, 이제는 그 질서에 균열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정답을 말할 때, 누군가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이게 배려인가?” “이건 누구를 위한 예의인가?”

우리가 덜 불안해지기 위해 만든 규범이 오히려 서로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배려의 얼굴을 한 거짓말이다. 진짜 예의란 옳음을 강요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고, 진짜 배려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마음에서 피어난다. 느슨함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듯, 단단함이 항상 정의를 뜻하지 않는다.


규범이란 결국 인간이 만든 하나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가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규범은 거짓말이 아닌 진실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