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사전은 취향을 이렇게 정의한다. “좋아하거나 즐겨하는 경향이나 성향.” 단순하다. 각자의 기질, 성격,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호. 이를테면 어떤 이는 짙은 커피향을 선호하고, 또 다른 이는 바닷바람에 실린 소금기를 좋아한다. 취향은 본래 그 정도의 말이었다. 특별한 해석도, 과장된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취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취향은 더 이상 개인의 소박한 선호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자, 타인을 재단하는 도구로 변해버렸다.


나는 재즈를 좋아한다. 요즘은 그런 대화를 할 일이 거의 없지만, 음악 이야기가 나오고 “뭘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렇게 대답한다. 그저 담담하게 — “재즈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 그렇구나. 약간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스타일이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재즈를 좋아하는지, 재즈 밴드를 했었고 내 플레이리스트의 절반 이상이 재즈라는 걸, 그도 아니면 내가 아는 재즈 연주자들의 이름을 끝도 없이 계속 나열하며 설명해야 했을까? 결국 그냥 웃고 넘겼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비슷한 일은 여행 이야기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내가 여행을 많이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묻는다. “그중에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요?” 나는 대답한다. “각자 다 매력이 있지만, 보통 잘 사는 나라보다 사람들이 좀 못 산다고 하는 나라들이 더 좋더라구요. 그런 곳이 더 편하고 사람들도 더 좋아요.” 대부분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가끔 이런 말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다. “그런 데는 물가가 싸고 돈 얼마 없어도 갈 수 있으니까 좋은 거지. 유럽이나 미국이 훨씬 낫죠.” 물론 살면서 돈이 많아본 적이 없으니 여행에서도 아낄 수 밖에 없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봤을 때, 그곳들에서 느낀 즐거움은 확실히 저개발국에서의 그것보다 작았다. 그 말에도 나는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경험이나 생각을 묻거나 이해하려는 의지는 없었고, 이미 상대방의 마음 속엔 모든 게 결정 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올린다. ‘좋아한다’는 단어조차 이제는 설명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걸. 누군가의 취향은 언제든 의심받고, 평가받고, 해석된다. 취향이란 더 이상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사회적 판단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그 사람은 취향이 좋아.” 이 짧은 말 속에는 사실상 여러 겹의 사회적 코드가 숨어 있다. 여기서 ‘좋다’는 무엇을 뜻할까? 아름다움? 희소성? 아니면 자본적 가치? 결국 대체로 그것은 소비 능력과 연결된다. 고가의 와인을 즐길 줄 아는가, 특정 브랜드의 가구를 갖추었는가, 해외여행에서 사진을 어떤 느낌으로 찍는가. 이런 것들이 곧 ‘좋은 취향’의 표지가 된다. 반대로 값싼 것, 흔한 것을 즐기면 ‘취향이 없다’는 낙인이 쉽게 찍힌다. 흥미로운 것은, 취향이 언제나 타자화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내 취향을 설명할 때보다 타인의 취향을 평가할 때, 그 말은 훨씬 힘을 가진다. 누군가의 옷차림을 두고 “촌스럽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한 사회적 좌표 위에 밀려난다. 이렇게 취향은 개별적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다시금 규범과 서열을 만들어낸다.


취향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들어 비로소 철학적 논의의 장에 올랐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 판단의 근거로 취향을 언급한다. 그는 미의 경험이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즉, 취향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타인과 공유될 수 있는 감각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의 전제는 결국 ‘합리적 인간’이라는 추상적 모델 위에서만 성립했다. 현실에서 취향은 늘 불평등하게 배치되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취향이야말로 사회적 계급을 드러내는 가장 은밀한 장치라고 분석했다. 음악, 미술, 음식, 언어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취향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계급적 위치를 은폐하는 기호학적 무기였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세련됨’이란 결국 상류층의 자기 표식이자 배제의 전략이다. 그는 말한다. “취향은 사회적 판단의 산물이며,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타인을 구별한다.”


현대 사회에서 취향은 더욱 노골적으로 소비주의와 결탁한다. 우리는 더 이상 ‘좋아한다’는 감정을 순수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스트리밍 플랫폼 속 플레이 리스트의 ‘힙’하고 ‘쿨’함의 기준이 따라붙고, 등산을 즐긴다고 하면 특정 브랜드의 장비를 떠올리게 된다. 옷차림은 즉각적으로 계급을 드러내는 신호가 되고, 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미식과 레벨의 이름으로 서열화된다. SNS는 이 모든 것을 묶어 전시하는 무대가 된다. 누군가는 새로 산 옷과 카페 한켠의 사진을 올리고, 다른 이는 ‘취향 있는 삶’을 증명하듯 집안의 인테리어를 공유한다. 원래는 은밀하고 사적인 기호였던 취향이, 이처럼 패션·음악·음식·취미로 이어지는 모든 영역에서 노골적으로 소비와 결합한 채 보여주기의 언어로 변한다. 결국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나는 이런 것을 살 수 있다”는 말과 구분되지 않는다.


원래 취향은 자유로워야 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만의 경향을 따르는 것. 하지만 오늘날 취향은 자유의 언어가 아니라 억압의 기제다. ‘취향이 없다’는 말은 곧 ‘정체성이 없다’는 비난으로 이어지고, ‘취향이 좋다’는 말은 곧 ‘계급적으로 우월하다’는 은밀한 코드로 작동한다. 우리는 마치 자유롭게 고른 것처럼 믿지만, 사실은 미리 규정된 선택지 안에서 맴돌 뿐이다. 이 지점에서 취향은 거짓말이 된다.

문학에서 종종 묘사되는 인물들을 떠올려보자.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는 화려한 삶과 로맨스를 꿈꾸지만, 그 욕망은 당대 소비문화와 유행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취향’은 결국 사회가 심어놓은 욕망의 틀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SNS에서 소비하는 ‘인테리어 감각’, ‘카페 취향’, ‘음악 플레이리스트’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거짓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첫걸음은 ‘취향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꼭 독특해야만 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 남들이 권하는 방식으로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오히려 솔직하다.

취향은 결코 나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흐르고 바뀌며, 때로는 사라지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오래 좋아하던 음악이 더 이상 마음을 울리지 않을 때가 있다. 새로운 취향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유동성이야말로 본래의 취향이 가진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그 변화를 ‘정체성의 부재’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선택하고 표명하라고 압박한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취향은 사실상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의 거짓말이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은 이미 광고와 시장의 손길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내 취향이라 부르며 스스로 속는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아마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평가로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혹은 시도.

취향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취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때 비로소 취향은 거짓말이 아니라, 조용히 스며드는 진실의 일부가 될 것이다.


취향이란 본래 소박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계급을 구분하고 타인을 평가하며 소비를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취향’을 말할 때마다 어쩌면 또 다른 거짓말에 가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거짓말을 직시하는 일은, 단지 사회 비판을 넘어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자리는 취향의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취향에 대한 거리 두기일 것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반드시 증명될 필요는 없다는 자각. 그 깨달음 속에서 취향은 다시 개인의 은밀한 자유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취향은 거짓말이 아닌, 인간적 유연성의 다른 이름이 될지도 모른다.




인용 출처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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