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꿈이 없었다."
정우성 주연의 영화 〈비트〉를 본 사람들은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방황하는 젊은이를 상징하던 문장. 꿈이 없다는 건 곧 길을 잃었다는 뜻이었고, 그건 한 세대 전체의 불안을 대변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꿈이 없었다.
대학 원서를 쓸 때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넥타이 메고 출퇴근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그건 대단한 꿈이라기보다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한 본능적 반감이었다. 치기 어린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줍잖은 낭만과 진심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조금 삐딱한, 소심한 청개구리 같은 아이였다.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혼자서는 늘 마음속으로 삐죽거리는. 원서를 써야 할 때가 왔을때,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확실히 하기 싫은 건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 영화학과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공부한 시간보다 영화를 본 시간이 더 많았지만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더 다양한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함께 단편 영화를 만들어가는 동안 애정은 점점 커져갔다. 언젠가부터 남들이 만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이 생겼다. 그러나 "그럼 영화감독이 꿈이야?"라는 질문이 돌아오면 늘 머뭇거렸다. "꼭 감독이 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사회가 인정하는 꿈의 문법은 언제나 '직업'과 '성공'으로만 번역되니까.
나는 몇 편의 단편과 웹드라마를 만들고 이런 저런 영화제에 초청 되었지만, 그게 다였다. 흔히 말하는 감독 ‘입봉’을 위해 몇 년 동안 시나리오를 쓰며 애썼지만 세상이 말하는 '꿈의 완성'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꿈은 목적지가 아니라 어떤 시절을 통과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내 마음에는 한줌의 거짓도 없다.
세상은 늘 꿈을 가지라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듣는다. "꿈이 뭐야?" "꿈은 꼭 있어야 해." 이 문장은 겉보기엔 희망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회가 교묘하게 숨겨놓은 명령이 들어 있다. 꿈을 가지라는 말은 사실상 "너도 유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에 가깝다. 꿈은 언제나 아름다운 포장지로 싸여 있지만, 그 속을 열어보면 효율과 경쟁, 그리고 노동의 논리가 들어 있다.
우리가 '꿈'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것은 사실 '직업'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꿈을 묻고 나면 반드시 되묻는다. "그걸로는 먹고살 수 있어?" 꿈은 생계의 언어로 번역될 때만 인정받는다. 평생 책만 읽고 싶다는 말은 낭만이 아니라 무책임으로 해석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다"는 바람은 '의욕 없음'이라는 낙인이 된다. 사회는 '꿈꾸는 자'를 찬양하는 듯하지만, 그 찬양은 시장의 규범을 따를 때만 유효하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더 이상 내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욕망은 외부에서 조작된다"고 말했다. 꿈 또한 그런 외부에서 조작된 욕망의 형태다. 꿈은 자유의 상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개인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끊임없이 생산적이 되려 애쓰며, 멈추지 못한다.
여기에 더 중요한 층위가 있다. 꿈은 순수한 의지나 재능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기질과 노력, 환경과 우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우리는 꿈의 서사를 이야기할 때 의지와 노력만 강조하지만, 실은 출발점의 조건이 결과를 가르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군가는 집 가까이에서 우연히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만나고, 누군가는 비슷한 재능을 지니고도 시작선에 서지 못한 채 다른 길로 흘러간다.
김연아 선수를 떠올려보자. 타고난 신체와 기질, 꾸준한 훈련과 의지, 그리고 어린 나이에 시작할 수 있었던 환경이 겹치며 세계 최정상의 궤적이 만들어졌다. 만약 시작의 시기가 늦었거나, 접근 가능한 링크가 없었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이끌어줄 코치를 만나지 못했다면? 재능은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을지 몰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동네의 스케이트장 하나가 삶의 궤도를 바꾼다"는 이야기는 미담이 아니다. 환경과 기회의 존재가 '꿈을 꾸게 되는 능력' 그 자체를 만든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에게 꿈은 일찍 찾아오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차이는 능력과 별개로 운과 환경의 변수에 크게 의존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모두가 꿈을 가져야 한다"는 합창은 섣부르다.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비워둔 공백이 필요하다. 기회가 닿지 않은 이에게 "빨리 꿈을 정하라"는 재촉은 폭력에 가깝다.
꿈은 근대의 산물이다. 산업화 이후 인간의 가치가 생산성과 연결되면서 '꿈을 가진 인간'이 이상적 모델로 등장했다. 꿈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 시스템의 동력을 상징했다.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곧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언어 속에서 꿈은 삶의 방향이 아니라 체제 유지의 윤활유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같은 방식으로 욕망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시간, 방향 없는 삶이 필요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노동', '일', '행동'으로 구분하며, 그중 '행동'만이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고 했다. 꿈은 대체로 '일'의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생산적인 목적을 지향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생산적일 필요가 없다. 때로는 아무 목적 없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상태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꿈이 없다는 건 곧 무가치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기 위한 준비'로서만 자신을 인정한다. 대학 입시, 취업, 승진, 자격증. 이 모든 과정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사다리처럼 제시되지만, 정작 그 끝에는 또 다른 목표가 기다릴 뿐이다. 꿈은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끝없이 갱신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이상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꿈은 종종 자유의 이름을 빌린 강박이 된다.
지금의 우리는 꿈이 아니라 불안을 꾸며 산다. 냉소처럼 들리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진술일 것이다. 우리는 꿈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더 큰 꿈을 만든다. 꿈은 불안의 순환 고리다. 그것이 실현되더라도 인간은 잠시의 안도 후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의 나'를 좇으며 현재의 나를 소모한다.
꿈이 거짓말이 되는 순간은 바로 이때다. 꿈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옭아매는 족쇄가 될 때. 꿈은 본래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향한 순수한 방향감각이어야 하지만, 현대의 꿈은 '남들이 인정할 만한 나'를 향한 시선의 구조로 바뀌었다. 현대인은 자신을 위해 꿈꾸지 않는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꿈을 꾸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그 꿈을 관리한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절제로부터 온다"고 했다. 꿈 또한 욕망의 한 형태다. 그것을 무한히 확대할수록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꿈을 이루는 법'은 배웠지만 '꿈에서 벗어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꿈의 실현이 아니라 꿈으로부터의 해방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꿈을 가지지 않는 일이 반드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성숙이다. 어떤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기보다, 바람이 불면 흘러가고 멈추면 고요히 머무는 삶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 속에는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마음이 있다. 꿈이란 결국 인간이 삶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언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언어에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삶의 실제를 잃는다.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가장 은밀한 거짓말은 이것이다. "꿈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은 꿈이 없어도 산다. 호흡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피곤해하며, 다시 잠든다. 삶의 본질은 꿈이 아니라 반복이다. 그 반복 속에서 느껴지는 리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꿈은 그 리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짧은 멜로디일 뿐이다.
그 리듬은 우연과 환경, 기회의 분배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누군가는 일찍 꿈을 만난다. 누군가는 끝내 만나지 못한다. 그 차이를 능력 하나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삶을 오해하게 된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꿈의 유무가 아니라, 그 꿈이라는 개념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그것을 다루고 있는가이다.
지금의 나 역시 이렇다 할 꿈은 없다. 다만 내가 무엇을 하기 싫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안다. 굳이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꿈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못 붙일 이유도 없다. 꿈? 지금처럼 세상에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잔뜩 삐딱하게 딴지를 거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하면서 즐거워한다. 어떤 날엔 세상 걱정이 밀려와 한숨이 나오고, 또 어떤 날엔 쓸쓸함에 잠길 때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날엔 아무도 모를 짓궂은 생각을 하며 혼자 키득거리고 웃기도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던지는 그 작은 의심과 질문들이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혹은 주변의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그 정도면 충분하다.
꿈은 의무가 아니다. 꿈은 사치품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한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결핍이 아니라 자유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자유야말로 내가 꾸던 유일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