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라는 거짓말

by 두둥실

사람들은 깨닫기를 열망한다. 그 욕망은 오랜 세월을 지나도 식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늘 ‘깨달음’이라는 단어에 매혹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 마치 어둠 속에 있던 방에 불이 켜지듯 세상이 달라질 거라 믿는다. 그러나 그 빛이 항상 진실을 비추는 것은 아니다. 때로 깨달음은 우리를 밝히는 대신, 더 단단한 어둠 속으로 밀어넣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작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누군가는 주식 투자 영상을 보며 성공의 비결을 깨닫고, 누군가는 친구와 다투고 나서 심리학 책 한 권을 읽으며 관계의 법칙을 깨닫는다. 인도의 어딘가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생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팔은 수십 년의 세월 끝에 굳어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그것이 진리에 닿는 길이라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과 기도, 연구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의 열망은 놀라울 만큼 순수하고 절실하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알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 열망은 때로 진리를 향하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이 듣고 싶은 말로 향한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너무 가까워서, 우리는 그것을 진짜로 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깨달음을 신의 음성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과학의 언어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형태가 어떻든, 인간이 깨달음을 갈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모르는 것의 불안이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았다”는 말에 안심한다. 그 말은 이해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불안을 덮는 주문이다. 깨달음이 진리라기보다 심리적 위안이 되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거짓말이 된다.


댄 애리얼리의 『Misbelief』나 리 메킨타이어의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같은 책을 보면, 음모론자들 또한 각자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코로나 백신이 빌 게이츠의 조종 수단이라 믿고, 어딘가에는 도마뱀 외계인이 숨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세계에는 이미 ‘깨달은 자’와 ‘아직 눈뜨지 못한 자’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즐겨 쓰는 비유 ―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 ― 이 사실은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예컨대 나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쓰인다는 점이다. “나는 빨간 약을 먹은 사람이다.” “이젠 눈이 떠졌다.” 이 말들은 더 이상 영화 속 은유가 아니다. 각자의 ‘진실’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내뱉는 자기 확신의 언어다.


깨달음이란 이름의 이 자기 확신은 위험하다. 깨닫는 순간, 인간은 자주 멈춘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종종 성장의 가능성을 잃는다. 그래서 어떤 깨달음은 진리로 나아가는 문이 아니라, 그 문을 닫는 자물쇠가 된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거짓말이다. 깨닫는 순간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시위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한 노인이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각자도생은 곧 죽음이다! 빨갱이를 몰아내야 이 나라가 산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단호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각자도생은 곧 죽음이다’—그 말만큼은, 어쩐지 나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각자도생’, 즉 각자 살아남자는 말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지금만큼 이 말이 무겁고 차갑게 다가온 적은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의 이면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이자 동시에, 냉소와 체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노인의 외침은 나와 비슷한 불편함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있었다.


나에게 ‘각자도생’은 서로의 삶에 무관심해진 사회, 공동체가 붕괴된 현실에 대해 반감을 일으키는 표현이었다. 반면 그 노인에게 ‘각자도생은 곧 죽음’이라는 말은, 분열을 멈추자는 호소가 아니라 오히려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결의였다. 그는 각자도생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명제 앞에서 만났지만, 그가 말한 ‘함께’와 내가 생각한 ‘함께’는 전혀 달랐다. 나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연대의 언어를 떠올렸지만, 그는 배제와 적대의 언어를 떠올렸다.

그의 ‘깨달음’은 공동체의 윤리가 아니라 이념의 확신으로 굳어 있었다. 깨달음이 진리가 아닌 신념으로 변할 때, 그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좁은 믿음의 틀 안에 가두고, 세상을 선과 악으로만 나누게 만든다. 어쩌면 그 노인과 나는, 같은 단어를 두고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같다. 우리는 정말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각자의 진영 속에서만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는가.



성철 스님은 말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사람들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 깨달음이란 원래 달을 보는 행위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손가락을 본다. 누가 손가락을 들었는지, 그 손가락이 어디를 향하는지, 혹은 그 손가락이 얼마나 유명한 손가락인지를. 달은 점점 멀어지고, 손가락만 남는다.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진짜 달을 본 사람은 드물다.


깨달음이라는 거짓말은 그럴듯한 진실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언제나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은밀한 선언을 포함한다. 깨달음은 우월감을 낳고, 우월감은 분리를 낳는다. 결국 진리를 향한 길이 오히려 타인을 밀어내는 벽이 된다. 깨달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야 하지만, 때로는 더 단단한 감옥을 만든다.


진짜 깨달음이란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더 이상 확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로 믿는다. 그래서 깨달음은 자주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로 끝난다. 나는 이제 알았다고, 나는 이제 다르다고. 하지만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닫힌다.


깨달음은 지식의 종착점이 아니라, 감각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진짜 깨달음은 머리로 번쩍 떠오르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이 익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깨달음이 개념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언어 이전의 떨림, 이해 이전의 직감, 정답 이전의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불교의 오래된 가르침 하나가 떠오른다. 돈오점수(頓悟漸修) ― “문득 깨닫되, 점차 닦아간다.” 깨달음은 한순간의 깨우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순간은 시작일 뿐이다. 문득 눈이 뜨였다고 해서 길이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수행의 시작이다. 세상을 다 이해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멈췄지만, 깨닫고도 계속 배우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진짜 깨달음은 단번에 얻는 번개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자신을 태워 나가는 불씨다. 돈오점수란 결국, 깨달음이 완성의 순간이 아니라 꾸준한 수련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현대의 깨달음은 너무 빠르고, 너무 쉽게 찾아온다. 짧은 영상 하나, SNS의 문장 하나로도 사람들은 ‘인생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은 인스턴트 음식처럼 즉각적이지만, 깊이가 없다. 진짜 깨달음은 조리 시간이 길다. 실패하고 후회하고, 다시 돌아와야만 익는다.


깨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르게 보고, 같은 말을 새롭게 듣고, 같은 사람을 다르게 이해하는 일이다. 깨달음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진짜 깨달음은 머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깨달음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전에는 몰라서 편했지만, 이제는 알아서 불편하다.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면 깨달음은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된다. 결국 깨달음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감내의 확장이다.


어쩌면 깨달음이란,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해하려는 욕망과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체념이 교차하는 그 지점, 그 모순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깊어진다. 깨달음은 완성형 명사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동사다. 우리는 언제나 깨닫는 중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거짓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를 향한다는 명목 아래, 스스로를 절대적 위치에 놓는 인간의 욕망이다. 진짜 깨달음은 ‘나는 알았다’가 아니라, ‘나는 여전히 모른다’로 끝나는 문장이다. 깨달음의 끝은 깨달음이 아니라, 다시 배우려는 마음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우리를 원점으로 데려다놓는다.

다만 이제, 우리는 같은 자리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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