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는 거짓말

'베이즈 정리' 로 해석하는 진실의 불완전함

by 두둥실

진실 : 거짓이 없는 사실

진실이라는 단어만큼 믿음직한 단어도, 동시에 거짓을 품은 단어도 없다. 언론은 진실을 밝힌다 말하고, 법정은 진실을 증명하려 다투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입으로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되는 ‘진실’이라는 말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를 되묻는 일은 거의 없다. 진실은 종종 너무 늦게 오거나, 너무 쉽게 단정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기로 선택한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해, 진실은 대개 시간에 구속된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것은 경험과 관찰의 결과일 뿐, 절대적 증명이 아니다. 데이비드 흄이 말한 ‘귀납의 문제’처럼, 수천 번 해가 떴다고 해서 내일도 해가 뜰 거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믿는 진실이란, 사실은 반복된 경험에 의해 확률적으로 지지받는 믿음의 형태일 뿐이다.


과학 역시 진리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반박되지 않은 가설’을 유지할 뿐이다. 뉴턴의 법칙은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속에 흡수되었고, 그 상대성이론조차 언젠가 더 넓은 이론에 포함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수학적 공리조차 선택된 전제 위에 서 있으며, 언어학적으로도 ‘사실’이라는 단어는 관찰자의 시점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있다면 다만,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있을 뿐이다.


다큐멘터리, 기사, 심지어 재판의 판결문조차 ‘진실을 담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카메라의 앵글은 선택이고, 편집은 의도이다. 그 과정에 담긴 시선의 방향, 프레이밍의 맥락, 누락된 문장 한 줄이 이미 ‘진실의 구조’를 바꾼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본다’기보다 ‘누군가가 진실이라 주장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걸 진실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진실이란, 믿음이 굳어진 형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보고 믿음을 세우고, 그 믿음을 오래 유지하면 그것이 곧 ‘진실’이라 불리게 된다.


이런 ‘믿음이 굳어진 진실’은 과학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19세기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의사들이 시체를 만진 손을 씻기만 해도 산모 사망률이 극적으로 떨어진다는 명백한 통계적 증거를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 의료계의 ‘진실’은 질병의 원인이 ‘나쁜 공기(미아즈마)’에 있다는 것이었고, 의사의 손이 죽음을 옮긴다는 생각은 그들의 권위를 모독하는 일이었다. 제멜바이스가 제시한 데이터는 반박할 수 없었지만, 주류 의사들은 그 증거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갱신하는 대신 그를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배척했다. 결국 진실은 데이터의 명확함이 아니라, 기존의 믿음을 지키려는 집단의 저항 속에서 결정되었다. 진실은 종종 증명되지 않은 믿음이 ‘진실’인 척하는 거짓의 얼굴을 쓴다.


그리고 1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제멜바이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데이터와 위성 관측, 해수면 상승의 패턴이 이미 기후 위기를 입증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수십 년째 같은 경고를 반복한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지구의 온도는 원래 올랐다 내렸다 하는 법이야.” “그건 정치적 음모야.” 그들의 말은 익숙하다. 제멜바이스를 비웃던 의사들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어떤 부강한 나라의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기후변화는 조작된 이야기’라며 비웃었고, 수많은 이들이 그 웃음에 안도했다. 왜냐면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바꿔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종 진실보다 평온을 택한다. 진실은 불편하고, 변화는 피로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진실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과장’이나 ‘조작’이라 부른다. 그렇게 믿음을 방어하는 동안, 진실은 또다시 늦게 오거나 너무 쉽게 왜곡된다. 결국 기후 위기라는 현실은 증거와 믿음 사이에서 기묘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데이터는 이미 충분하지만, 인간의 믿음은 여전히 그보다 느리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판단하고, 그것을 믿게 되는가?” 그 과정을 수학적으로 상상해보면 통계에서 사용되는 베이즈 정리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통계 역시 이 ‘진실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 속에 나뉜다. 베이즈 정리는 이렇게 묻는다. “새로운 정보를 얻었을 때, 당신은 당신의 믿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 즉, 진실이란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확률적으로 갱신되는 추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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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은 간단하지만, 인간의 사고 전체를 압축한다. P(가설)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오며 쌓은 사전 확률이다. P(증거|가설)는 우리가 새로 접한 정보다. 그리고 P(가설|증거)는 그 둘을 통합해 얻은 새로운 믿음이다. 즉, 베이즈 정리의 정신은 “진실이란 확률로 추정되고, 경험으로 갱신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통계는 베이즈식이 아니다. 현대 통계의 주류는 ‘빈도주의(frequentism)’다. 빈도주의는 확률을 “무한히 반복했을 때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비율”로 정의한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0.05의 확률로 일어나면, “100번 중 5번쯤 일어날 것”이라 말한다. 이 방식은 명확하고 단정적이어서 언론과 대중에게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빈도주의가 가정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실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삶은 단 한 번의 샘플, 단 한 번의 선택,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단 한 번의 결과 속에서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빈도주의 통계는 세상을 ‘전체 집단’의 평균으로 본다. 반면 베이즈 통계는 ‘관찰자의 믿음’을 포함한 불확실성으로 본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백신이 90% 효과가 있다”고 말할 때, 빈도주의자는 “100명 중 90명이 보호된다”라고 말하지만, 베이즈주의자는 “주어진 데이터와 선행 지식으로 볼 때, 그 효과가 90%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한다. 전자는 결과 중심이고, 후자는 믿음의 확률 중심이다. 그래서 전자는 결론을, 후자는 맥락을 강조한다.


이 차이는 철학의 언어로 옮기면, ‘객관적 진실’과 ‘해석된 진실’의 차이다. 빈도주의는 진실을 고정된 외부의 값으로 상정한다. 반면 베이즈주의는 진실을 관찰자의 위치에서 매번 새롭게 계산되는 확률로 본다. 그래서 빈도주의가 “진실을 측정하려는 시도”라면, 베이즈주의는 “진실을 추정하려는 사유”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두 관점은 공존한다. 과학 실험과 임상 통계, 공공 정책에서는 여전히 빈도주의가 표준이다. 명확한 판단 기준과 재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후 예측, 자연어 처리, 의학적 추론 같은 분야에서는 베이즈적 접근이 점점 중심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반복’보다 ‘갱신’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베이즈 정리는 확률을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갱신 가능한 믿음의 구조’로 본다. 이건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태도다.


이론은 단순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베이즈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증거를 받아도 믿음을 잘 바꾸지 않는다. 이미 형성된 사전 확률(prior)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모론자는 어떤 반박이 주어져도 “그것마저 조작된 증거”라 믿고, 극단적 정치 성향의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말만 진실이라 여긴다. 세대 갈등과 성별 갈등도 같은 구조다. 각자의 경험과 불만, 상처가 ‘사전 확률’이 되어버려, 상대의 증거는 믿을 수 없는 음모로 변한다. SNS의 알고리즘은 이 믿음을 더욱 강화시킨다. 비슷한 관점을 가진 사람끼리만 만나게 만들고, 그 안에서 반복된 확신은 통계적 ‘갱신’이 아니라 ‘폐쇄’로 이어진다. 종교나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믿음은 신념을 넘어, 검증 불가능한 진실로 신성화된다. 진리를 말한다는 자들이 실제로는 진실을 갱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사전 확률’의 감옥에 갇혀 있으며, 세상은 그 안에서 점점 단순해지고, 단정해지고, 위험해진다.


이런 시대에서 베이즈적 사고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우리가 어떤 사건을 접할 때, 그 일에 대한 ‘사전 확률(prior)’은 이미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 문화, 교육, 감정이 만들어낸 선입견의 집합이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 우리는 그 믿음을 조금씩 수정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후 확률(posterior)’이다. 베이즈 정리는 이 과정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진실이란 처음부터 완성된 명제가 아니라, 정보가 추가될 때마다 조금씩 갱신되는 추정치다. 수학에서는 그것이 확률의 계산으로 나타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대화와 성찰, 학습과 이해의 형태로 드러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일 - 이것이 일상의 베이즈 갱신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주 그 갱신을 멈춘다는 것이다. 이미 가진 사전 확률이 너무 단단해 새로운 데이터는 들어오자마자 거부되거나 왜곡된다. 결국 진실은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얼마나 유연하게 업데이트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진실은 언제나 논쟁 가능한 상태에서만 존재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말이다. 진실은 합의의 산물이자 오해의 그림자다. 우리가 그걸 추구할수록, 오히려 진실은 멀어진다. 왜냐면 인간은 세상을 관찰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눈빛이 이미 세계를 변형시킨다.

나는 그래서 ‘진실’이라는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대체로 믿거나, 믿기로 선택하지만, 그것이 진리나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진실은 언제나 수정될 수 있고, 변형될 수 있고, 재구성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심은 믿는다. 그 진심에는 왜곡과 거짓, 욕망이 함께 녹아 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믿음직하다. 이미 그 안에 모든 모순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기에, 섣부른 판단 대신 ‘사후 확률’의 공간을 남겨둔다.


그건 논리적 확률이 아니라, 감정의 확률이다. 진심이란, 베이즈 정리의 갱신이 멈춘 자리에서 발화되는 인간의 언어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한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진실보다, 불완전한 진심에 더 귀를 기울이려 한다. 다만 그 마음이 타인의 상처 위를 밟고 서거나, 욕망의 독으로 변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인간적인 온도를 지닌 진심이 아니다. 그건 “세상 따위 중요하지 않아”라는 오만한 자기 확신의 언어이며, 그런 마음만은,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용납할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확률이고, 진심은 언제나 모순이다.

그 둘이 엉켜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진실을 조심스럽게 다루되, 진심을 경청하는 것. 그게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진실이라는 거짓말’에 잠식되지 않기 위한 우리의 마지막 균형감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진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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