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맞고 마땅함.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음.
“적당히 하지 말고, 제대로 해.”
이 말만큼 한국 사회를 정확히 요약하는 문장도 드물다. 노력의 정도를 넘어 인간의 가치 판단까지 포함한 명령문이다. ‘적당히’는 언제나 ‘불성실’의 동의어로 쓰여왔다. 적당히 한다는 건 대충 한다는 뜻이었고, 대충 한다는 건 도덕적으로도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전은 다르게 말한다. ‘적당(適當)’의 정의는 “알맞고 마땅함.” 본래의 뜻에는 나태함이 없다. 오히려 균형과 조화의 미덕이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그 단어에 게으름과 변명의 그림자를 덧씌웠을까.
적당한 것은 모자람이라는 통념은 한때 유효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적당함’에 대한 불신은 불안과 경쟁을 감추는 말이 되었고, 과잉 성과와 소셜 미디어의 완벽주의가 압력을 키우고 있다. 이제 ‘적당함’을 회복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운 시대다.
적당함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혜이며, 타인과 세상에 대한 배려다. ‘적당히 한다’는 건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한다’는 뜻이다. 적절함은 완벽보다 어렵다. 완벽은 기준이 명확하지만, 적절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이자 판단력이다.
유교에서 말한 ‘중용(中庸)’이 바로 그 감각의 철학이다. <중용>은 말한다.
“중용의 덕이란 참으로 지극하도다. 그러나 이를 오래 지키는 이는 드물다.”
(中庸之為德也,其至矣乎!民鮮能久矣。)
중용은 흔히 ‘중간’으로 오해되지만, 주희는 이를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것”(不偏不倚, 無過不及)이라 보았다. 중요한 건 고정된 점이 아니라 매 순간 달라지는 ‘적절함’이며, <중용> 1장은 “희로애락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 드러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하여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발현될 때 그 절도를 살피는 실천을 강조한다. 적당함을 아는 것은 쉽지만, 그 균형을 오래 지키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중용은 단순한 절제의 미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이자 감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고정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 전체의 상황 속에서 가장 적절한 지점을 찾아가는 연습이다.
‘적당히 하지 말고, 제대로 해라.’
이 말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생존의 역사에 닿는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 그 시절의 한국은 말 그대로 ‘죽지 않기 위해’ 일했다. 적당히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고, 경쟁은 곧 생존이었다. ‘적당’은 나약함이었고, ‘과함’만이 의지였다. 적당히 살자는 말은 체제 밖의 위험한 소리로 들렸다. 그 시대의 윤리에서 ‘적당’은 불온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도덕이 지금까지 유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세계는 변했고, 생존의 방식도 달라졌다. 이제는 ‘적당하지 않음’이 오히려 타인에게, 그리고 지구 전체에 피해를 준다. 완벽을 향한 경쟁은 타인의 시간을 갉아먹고, 노동을 소모하며, 소비의 과잉을 만든다. 더 이상 열심히 하는 것만이 선이 아니다.
영화계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떠올려본다. 영화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고, 시간과 자원이 집중되는 작업이다. 수많은 NG 끝에 단 하나의 OK를 건져내는 게 모두의 목표이다. 그런데 그 ‘한 컷’의 기준은 누구에게나 다르다. 대개 그 기준은 감독에게 달려 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 장면의 완벽을 위해 밤을 새우고, 며칠을, 때로는 몇 주를 소비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배우와 스태프는 물론, 촬영 장소와 장비, 심지어 촬영 현장의 자연과 동원된 동물까지도 그 무리의 대상이 된다. 그 과정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완벽한 OK 컷을 위해 주변에 약간의 피해가 발생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게 미덕으로 남기도 한다. 요즘엔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엔 특히 그랬다.
적당히 하지 않고 무리하게 시간과 타인을 동원하는 일은 책임감이나 성취욕의 표현일 때도 있지만, 불확실한 판단을 덮거나 역량의 빈틈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완벽 추구는 언제나 숭고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에게 요구되는 희생의 형태로 쉽게 변주된다.
어느 감독은 말했다. “감독의 일은 가장 적절한 시점에 포기하는 것이다.” 완벽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대개 완벽을 지시한 사람이 아닌, 그 곁의 누군가가 치른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다 즐겁고, 일정과 예산에도 딱 맞춰서 찍었지만 재미없는 영화보다, 수많은 원성과 문제를 일으켰지만 결국 성공한 영화. 물론 우리는 후자를 택한다. 하지만 이 중간 지점, 과정은 전자에 조금 더 가깝고 결과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깝게. 물론 그것이 제일 어렵다. 우리가 늘 결과 중심으로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변명일지도 모른다.
한 장면을 위해 며칠을, 한 제품을 위해 수백 시간을 갈아 넣는 문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가 여전히 버젓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폭력이다. 끝없이 반복하고 무한의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결국 또 다른 희생 위에 세워진다. 그 공식이 성공의 이름으로 남는다면, 다음 작업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할 것이다. 시스템과 조화, 배려를 토대로 효율과 완성도를 함께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진짜 ‘제대로’ 하는 일이다. 때로는 완벽하지 않아도, 기본에 충실했다면 만족할 줄 아는 선택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희생해 완벽을 이루겠다는 신념은 개인 차원에서도 문제를 만든다. 물론 그것이 본인의 진심 어린 선택이라면 말릴 이유는 없다.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등을 다치고도 경기에 나가는 장면처럼, 모두가 말릴 때 그가 그 순간이 자신의 최고라고 믿고 코트로 나가는 건 낭만이다. 그러나 아픈 선수를 팀을 위해 나가야 한다고 지시하거나, 암묵적 눈치로 압박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물론 이 경계는 현실에서 모호하다. 팀 스포츠에서 동료들의 기대와 응원, 그리고 본인의 의지는 쉽게 뒤섞인다. 강백호 스스로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팀에 대한 책임감이나 주변의 기대 때문에 그렇게 ‘선택’하는 것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당사자에게 거부할 여지가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조직이 함께 지려 하는가 - 이 두 가지가 선택과 강요를 가르는 최소한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사회가 ‘적당히는 곧 패배’라 믿기 시작하면, 이 최소한의 경계마저 무너진다. 개인은 소진되어 결국 주저앉고, ‘열심히 해야 산다’는 말은 어느새 ‘쉬면 죽는다’는 협박으로 바뀐다.
우리는 오랫동안 ‘적당한 것’을 미워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너무 많은 ‘과함’으로 병들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그 끝에는 늘 소진이 있다. 한 사람의 소진으로 끝나지 않는다. 과로는 사회적 비용을 낳고, 경쟁은 타인을 소외시키며, 무절제한 소비는 지구의 회복력을 무너뜨린다. 그러니 이제 ‘적당히 하라’는 말이 새로운 윤리적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적당함’의 회복은 철학적 과제가 되었다. 인간의 욕망이 한계 없는 세상에서, 적당히 멈출 줄 아는 감각은 생태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더’의 윤리를 벗어나 ‘충분함의 미학’을 되찾는 일이다. 욕망은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치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힘이 된다. 적당한 열은 오래 간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뜨겁게만 살겠다는 집착은 결국 소진으로 끝나지만, 적당한 열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준다.
적당한 것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이며, 타인의 여유를 남기는 예의다. 완벽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그리고 지속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 바로 ‘적당함’이다. 물론 ‘적당함’이 면피나 대충의 다른 이름이 되어선 안 된다. 공유된 기준과 타자에 대한 고려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기술이 된다.
이제 ‘적당히 하라’는 말은 변명의 언어가 아니라, 성찰의 언어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과함’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완벽의 그림자 속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산의 정상만 보고 달린다. 그저 앞사람이 향하는 곳으로, 더 빠르게 가는 것만이 옳다고 믿는다. 어떻게 그 길로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한편 산과 숲에도 피해를 남기지 않는 길일지 고민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대신, 속도를 올린다. 방향을 묻는 대신, 남들이 가는 길을 따른다. 열심히 산다고 말하지만, 때로 그 열심은 생각을 멈춘 다른 이름의 게으름이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실패자라 믿고, 잠시 멈추면 낙오자로 취급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세운다.
모두가 정상만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는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포크레인으로 숲을 밀어버리며 앞서 나간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상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성공자’로 불린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타버린 나무와 깎여나간 흙, 그리고 숨이 찬 사람들만 남는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도 “그래도 결국 올라갔잖아”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정상만을 향한 속도의 윤리 속에서, ‘적당히 간다’는 감각은 너무 쉽게 비난받는다. 하지만 오래가는 길은 언제나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만들어진다.
적당히 멈추는 것, 적당히 만족하는 것, 적당히 믿는 것. 그 모두가 사실은 세상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다정하게 유지시키는 힘이다. 적당히 한다는 건 덜 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잘 사는 방법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더 많은 봉우리에, 더 빨리 오르려 애써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봉우리로 향하는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의 의미는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