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래 들판의 동물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초원과 숲속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사냥을 하며 하루를 버텼다. 그때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의 계획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가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우리는 벽을 쌓기 시작했다. 울타리와 제도, 사회와 문명. 그 안은 안전했고, 덕분에 우리는 오래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가, 아니면 단지 생존하고 있을 뿐인가.
오늘날의 인간은 그 어떤 시대보다 ‘안전’을 갈망한다. 좋은 직장, 확실한 수입, 예측 가능한 미래. 모든 선택의 기준에는 “안전하냐”가 있다. 불확실은 악이고, 변동은 피해야 할 재앙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유전자는 여전히 불안정한 세계에 맞춰져 있다.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Behave』에서 “우리의 뇌는 10만 년 전 수렵채집인의 뇌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¹ 사냥을 위해 긴장하고 위험을 감지할 때 활발해지도록 설계된 신경계는 이제 모니터 앞에서 증시 그래프를 바라보며 과도하게 반응한다. 원시의 불안은 생존의 도구였지만, 문명의 불안은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인간은 또 다른 울타리를 세웠다. 국가, 제도, 보험, 연금, 부동산. 안전을 약속하는 수많은 장치들이 생겼고, 그것들은 일종의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안전이 늘 평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공허의 시대』에서 이렇게 썼다. “현대인은 불안을 몰아내려다 오히려 공허 속에 빠졌다.”² 안전한 삶을 원했지만, 그 안전 속에서 감각이 둔해지고 의미가 사라졌다. 마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난 우리는 햇빛을 보며 자라지만, 바람을 견디는 힘은 잃어버렸다.
나는 제주도에 산다. 물에서 노는 걸 좋아해서 여름이면 집 앞 포구에 나가 잠깐 수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프리다이빙을 즐긴다. 멀지 않은 곳에 프리다이빙하기에 아주 좋은 스팟이 있었다. 공식적인 물놀이 장소는 아니지만, 풍경이 좋고 수심도 깊어 근처에 사는 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곳이 SNS를 타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행객들이 몰려들었고, 안전요원도 없고 안내 표지도 없는 그곳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졌다. 몇 번은 렌트카를 몰고 무작정 온 사람들에게 진입 지점이나 수심, 파도의 방향을 알려주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고마워했지만, 어떤 이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크게 다친 사람도 있었고, 사망자까지 나왔다.
그 결과는 뻔했다. 그곳은 폐쇄되었다. 바위와 돌 사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철문이 세워지고, ‘출입금지’와 ‘사고다발지역’이라는 붉은 경고판이 붙었다. 누군가 들어가면 바로 신고가 들어오고, 행정은 철저하게 통제했다. 나는 그 경고판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그곳은 이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과거의 낙원이 되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그 사고를 막지 못한 행정의 책임일까, 무모하게 들어간 사람들의 책임일까, 아니면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위험을 삭제해버리는 사회의 책임일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이렇게 폐쇄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까. 혹은 ‘사고 다발 구역 주의 바람 (안전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경고판 하나 세워두는 정도면 충분할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방안이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위험성은 충분히 알려주되 본인이 감안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방식. 정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변화는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사고 방지’라는 명분으로 세상의 모든 불확실성을 지워가고 있다. 공공은 치명적 위험의 정보를 줄이고 최소한의 방어선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그 너머의 선택과 책임은 개인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일은 제주뿐 아니라 한국 곳곳에서 반복된다. 조금이라도 사고가 나면 등산로는 막히고, 절벽 전망대에는 펜스가 세워진다. 제주의 오름과 전국의 산마다 계단이 깔리고, 위험할까 봐 울타리가 늘어선다. 누군가 다칠까 봐, 불행이 생길까 봐, 모든 것이 통제되고 규격화된다. 하지만 세계의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그렇게까지 하는 곳은 드물다. 어떤 나라는 그럴 여력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고, 어떤 나라는 의도적으로 자연을 그대로 두어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게 만든다. 행정적인 관리나 대처가 어려우니 아예 규제를 하는 것도 한편 이해는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사람들은 위험을 스스로 판단하고 감당하는 능력을 잃어간다. 기준을 국가나 기관에 넘긴 채, 안전의 주체로서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이다. 마치 헬멧과 보호 장비에 의존하느라 정작 위험을 피하는 본능적 감각이 무뎌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통제의 습관’은 단지 물리적 안전에만 그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편안함을 느끼는 방식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마이클 이스터는 『편안함의 습격(The Comfort Crisis)』에서 이것을 “편안함에 의한 잠식(comfort creep)”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편안함에 적응하면 이전의 편안함을 더는 수용하지 못한다. 즉, 오늘의 편안함은 내일의 불편함이 된다.”³ 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책에서 말하는 ‘편안함’은 사실 ‘안전함’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오늘의 안전은 내일의 불안이 되고, 우리는 끊임없이 더 안전한 환경을 찾아 이동한다. 그렇게 안전의 기준이 조금씩 높아질수록, 인간은 더 약해지고 더 쉽게 불안을 느낀다. 이스터는 또 이렇게 썼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실패의 결과를 엄청나게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실패란,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을 망쳐서 상사에게 찍히는 정도를 뜻하죠.” 인간의 마음은 이런 사소한 실패조차 생존의 위협처럼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안전한 환경이 오히려 인간의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킨 셈이다.
안전하면 좋다. 하지만 그 ‘좋음’이 언제부터 ‘절대의 기준’이 되었을까. 그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시도조차 못하게 되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수많은 과학자와 예술가, 탐험가와 사업가들이 안전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들의 모험은 실패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많은 실패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실패 위에서 문명은 성장했다. 만약 모든 것을 안전함의 범위 안에서만 판단했다면, 인류의 비행기는 하늘에 오르지 못했고, 바다는 여전히 신화 속 존재의 영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 중에는 섣부른 도전도, 무모한 모험도 있었지만 그것들조차 인류의 가능성을 넓혔다. 반면 오늘의 사회는 점점 더 ‘안전 제일’을 외치며 모든 리스크를 차단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경직되며, 더 두려워한다. 우리는 더 이상 모험가가 아니라 안방의 관람자가 되었다. 안전은 우리를 지켜주는 듯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용기를 빼앗는다.
오늘의 세상은 인간 역사상 가장 안전하다. 전염병, 기아, 전쟁의 위험은 줄었고,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안전’을 확인하며 산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평을 넓혔다. 그 두려움은 세대를 거치며 강화되었다. 마치 강박처럼, 우리는 안전을 부르짖는다.
불과 십몇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 혼자 등교하고 하교하는 일은 당연했다. 이제는 그런 아이를 둔 부모가 무책임하다는 시선을 받는다. 뉴스는 매일 사고를 알리지만, 오늘도 수백만 명이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는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오지로 여행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고 소식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실제로 국내 범죄율은 10년 넘게 하락세임에도, 사람들의 체감 불안은 오히려 상승했다. 불안은 통계가 아니라 상상 속에서 자란다.
두려움은 자본의 언어로 확대된다. 보험, 안전장비, 보호시스템—모두가 불안 위에 세워진 산업이다. 이제 안전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가 되었다. 이 시대에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건 제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불안을 견디는 힘, 그 균형감각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지킨다.
물론 산업 현장 같은 곳의 안전은 예외다. 그곳의 안전은 철저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산업 현장에서 죽고 다친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정작 이런 곳은 자본의 논리 아래 소홀히 다뤄지고, 진짜로 위험이 필요한 영역이 아니라 이윤을 우선하는 체계 속에서 방치된다. 반면 진짜 모험이 필요하고 새로운 시도가 일어나야 할 곳들은 각종 통제와 제약으로 묶여 있다. 이런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쩌면 이는 개인보다 시스템이 우선하는 사회의 그림자일지 모른다. 안전의 본질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때, 안전은 더 이상 선이 아니다.
모여 살기 시작한 인간이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처럼, 문명은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병들게 만들었다. 도시의 편리함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고, 제도는 판단의 자율성을 빼앗았다. “국가가 해줄 거야.” “법이 보장해 줄 거야.” 그 말 뒤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숨어 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이런 사회를 ‘제도에 의해 무력화된 인간’이라 부르며 경고했다.⁴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기보다 시스템이 정한 경로를 따라간다. 학교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노후로. 그 사이의 모든 ‘불확실한 모험’은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불확실은 본래 생명의 조건이다. 부처는 출가의 순간, 안정된 삶을 거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거주하지 말고 걸어라.” 움직이며 깨닫고, 다니며 구하라. 그 가르침은 단순히 수도승의 규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 방법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결국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건 종교나 철학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젊은 찰스 다윈은 5년간의 항해 중 폭풍과 질병, 그리고 낯선 세계를 마주했다. 남미의 해안과 갈라파고스의 섬들을 거치며 그는 생명의 다양성과 변화의 원리를 관찰했다. 그 여정은 언제나 위험했고, 그 위험이야말로 그의 사유를 깊게 만들었다. 진화론은 안전한 연구실이 아니라,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사유는 늘 불안정한 길 위에서 자란다. 위험을 피하지 않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문명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전기와 의료, 교육과 통신. 그러나 그 혜택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결정권의 상실, 그리고 불안을 견디는 능력의 상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을 고민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안전하게 버틴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전하게 버틴다’는 말은 어쩐지 살아간다는 말과는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살기 위해 죽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물론 울타리 밖의 삶이 언제나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위험이 있고, 실패가 있고, 불확실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원래 환경이었다. 불안은 불행이 아니라 생의 증거다. 그것이 사라질 때 인간은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기계로 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더 높은 울타리를 세우며 안전을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로 나아가 바람과 불안을 마주할 것인가. 확실한 답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있다. 안전만을 향한 세상은 결국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순간에만 인간은 자신을 다시 확인한다. 도널드 월쉬는 “삶은 안전지대 (comfort zone) 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고 말했다.⁵
삶은 완벽한 안전 속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한 위험과 불안 속에서만 그 본래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¹ 로버트 새폴스키, 『Behave: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과학』
² 질 리포베츠키, 『공허의 시대(L’ère du vide)』
³ 마이클 이스터, 『편안함의 습격(The Comfort Crisis)』
⁴ 이반 일리치, 『탈학교 사회
⁵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