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은 참, 재밌다

한글날 쓰는 한국말에 대한 이야기.

by 두둥실


나는 ‘귀찮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실제로도 아주 자주 쓴다. (그렇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하지만 단지 내 생활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이 말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다른 언어로 옮기기 힘들 만큼 독특하고, 그 안에 여러 상황과 마음의 상태가 함축되어 있다. 무언가를 하기 싫을 때, 약속이 버겁게 느껴질 때, 혹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이 조금 부담스러울 때—이 한 단어가 그 순간의 나를 대신한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다. 사피어와 워프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사고의 방향을 이끈다고 보았다. 이후 그들의 주장은 여러 비판과 함께 수정되었고, 오늘날에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 방향을 규정한다”는 온건한 상대성으로 이해된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여기에 더해, 언어가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각이 형성되는 구조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간을 낭비한다’, ‘마음이 무겁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은유로 이해한다. 즉, 언어는 우리의 인지 틀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것을 강화한다. 언어는 거울이 아니라 거푸집이다. 그렇다면 ‘귀찮다’는 어떤 세계를 빚어왔을까.




‘귀찮다’라는 말의 기원은 ‘귀치 않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하다(貴)’는 소중하거나 가치 있다는 뜻이고, 여기에 부정형이 붙으면서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 굳이 나설 만큼의 일은 아니다’라는 뉘앙스를 담게 되었다. 이를테면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나와서 한잔하자”고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친구와의 만남이 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더 끌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그에 비해 덜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아, 귀찮다.”


이 한마디 속에는 가치 판단, 감정의 미세한 온도, 그리고 선택의 방향까지 모두 들어 있다. 단순히 ‘하기 싫다’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는 그 일이 굳이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과 태도의 언어다. 그렇게 ‘귀찮다’는 말은 점차 더 많은 정서와 맥락을 품게 되었고, 짧지만 무수히 많은 생각과 감정을 함축하는 단어가 되었다. 비슷한 예로 경상도에서 많이 사용하는 “쫌!”이나, 연인이나 가족 간 다툼에서 터져 나오는 “아 몰라!” 같은 말들도 있다. 이들 역시 짧지만, 상황과 감정의 결을 압축해 전달하는 한국어 특유의 표현 방식이다.


영어로 ‘귀찮다’를 옮기려 하면 금세 막힌다. It’s bothersome, I don’t feel like it, It’s annoying (상황에 따라 ‘짜증스럽다’로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이 말만으로는 ‘귀찮다’를 온전히 옮길 수 없다.) 영어는 감정을 이유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고, 문장 구조가 행위자(주어) 중심으로 짜여 있다. 반면 한국어의 ‘귀찮다’는 원인을 생략한 채 감정의 상태 자체를 선언한다. 감정이 설명이 아니라 존재로 나타난다. “나는 화가 났다(I am angry)”보다 “화난다”가 자연스러운 언어에서, 감정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기보다 나를 ‘지나가는’ 흐름이다.

이 점에서 일본어 めんどくさい (멘도쿠사이) 와도 닮았지만 초점은 다르다. めんどくさい가 주로 행위의 번거로움에 붙는다면, ‘귀찮다’는 심리적 평형이 흔들리는 느낌, 내 마음의 리듬을 지키고 싶다는 충동에 가깝다. 그래서 ‘귀찮다’에는 피로, 무기력, 평온에 대한 애착, 때로는 애정 어린 거리두기까지 겹겹이 들어 있다.


이 차이는 한국어의 구조에서 힘을 얻는다. 한국어는 교착어다. 어근에 조사와 어미가 층층이 달라붙어 의미와 정서를 연쇄적으로 변주한다. “가다”에 “-고 싶다”, “-기도 하다”, “-면 좋겠다”, “-지 않니?”를 붙이면 한 동사에서 욕망·양가감정·가정·친근한 권유가 분기한다. 문장의 끝을 어떻게 낮추고 올리느냐, 어미를 얼마나 늘이느냐가 곧 관계의 온도와 감정의 결을 바꾼다. 같은 “그래.”가 칼날처럼 차가울 수도, 담요처럼 따뜻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또한 한국어는 화용론적 성향이 강하다. 의미가 문장 안의 문법 요소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관계와 맥락에서 완성된다. “밥 먹었어?”는 친구 사이에선 안부, 연인과 가족에게는 돌봄, 직장에서는 예의의 신호다. 한국어에서 말뜻은 종종 문장 밖에서 자란다. 그래서 한국어는 의미보다 분위기, 문법보다 자리(場)가 중요하다.


이런 구조는 중간 온도의 감정을 섬세하게 가리키는 어휘를 풍성하게 키워냈다. ‘섭섭하다’, ‘서운하다’, ‘그립다’, ‘짜증나다’, ‘귀찮다’ 같은 말들이 그렇다. 분노·슬픔 같은 극단이 아니라 일상에서 가장 자주 스치지만 포착하기 어려운 감정의 작은 파장들이다. 색채 표현을 봐도 ‘노랗다’와는 다른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누리끼리하다’가 있다. 여기서 단어는 색의 ‘분류’를 넘어서 정서의 ‘질감’을 함의한다. ‘노르스름하다’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그림자가, ‘누리끼리하다’에는 눅눅하고 살짝 불쾌한 기운이 묻어난다. 한국어는 감각과 감정이 분리되지 않는 언어다.



감정에 민감한 언어는 집단 감정의 순환도 빠르게 만든다. ‘냄비근성’이라 부르는 현상은 비아냥의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서의 신속한 공유와 강한 공명력이라는 특성을 보여준다. 한국어는 감정을 짧고 정확하게 표지(表識)할 수 있는 언어다. 즉, 감정의 결을 한 단어로 포착해 즉각적으로 퍼뜨리고, 동시에 깊게 울려 퍼지게 만든다. 이런 언어적 구조는 한국 사회의 집단적 반응 속도뿐 아니라 그 진폭, 즉 감정이 서로에게 미치는 울림의 크기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공통의 정서가 형성되는 순간, 놀라울 만큼 빠르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한마음처럼 크게 흔들린다.


IMF 시절의 금모으기 운동,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 그리고 촛불집회와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 까지 — 모두가 언어를 매개로 정서가 전파되고, 그 정서가 행동으로 확장된 사례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하나다. “한마음으로.” 영어로는 보통 together라 표현하겠지만, “한마음으로”는 그보다 훨씬 내밀한 결속을 품고 있다. 굳이 옮기자면 as one 혹은 with one heart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들엔 한국어가 지닌 미묘한 따뜻함, 서로의 마음이 동시에 떨리는 그 결의 온도가 없다. 영어가 행동의 협력을 말한다면, “한마음으로”는 마음의 진동을 함께 느끼는 상태에 가깝다.


문학에서도 이 언어의 습성은 선명하다. 한국 문학이 때로 ‘서사에 약하다’는 지적을 받는 까닭은 이야기를 못해서가 아니다. 교착어로서 한국어 문장은 스스로 사건이 된다. 문체가 줄거리의 속도를 제어하고, 어미의 호흡이 갈등의 파장을 만든다. 그래서 한국의 독자들은 “문장이 좋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미사여구의 칭찬이 아니라, 문장이라는 형식 안에서 감정의 세계가 얼마나 진하게 성립했는가에 대한 평이다.


그렇기에 “서사에 약하다”는 평가는 절반의 오해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 드라마, 웹툰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사가 결국 감정의 전달을 위한 장치라고 본다면, 우리에겐 한국말이라는 손쉽고 유용한 도구가 있었던 셈이다. 한국어의 문장은 정서의 결을 서사보다 앞세우고, 그 미묘한 리듬 속에서 다른 형태의 이야기성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인정받는 이유는 서사나 표현 방식이 세계화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는 한국인의 정서, 그리고 한국말의 정서가 깔려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 배우들의 연기에 놀라움을 표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그건 단순히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연기와 표현 밑에 한국어 특유의 섬세한 감정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가끔 한국 작품을 보고 감동하는 외국인들의 리뷰를 볼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한국어를 이해하고 본다면 지금 느끼는 감동보다 아마 몇 배는 더 깊고 크지 않을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국어는 한국에서만 쓰인다. (많은 외국인들이 배우고 있긴 하지만.) 영어권 사람들은 대단한 학위가 없어도 세계 어디서나 영어를 가르친다. 때로는 부럽고, 때로는 씁쓸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고유의 문화와 예술을 만들고 그것을 세계로 전파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한국어의 고립성에 있다.


이런 감정의 리듬과 언어의 밀도는 한국어의 구조적 고립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어가 고립어라는 말은 두 층위가 있다. 하나는 형태론적으로 굴절이 적은 ‘고립적(analytic) 언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계통적으로 고립된(language isolate) 언어라는 뜻이다. 한국어는 형태론적으로는 교착어이며, 계통 분류상으로는 인접 대어(大語)들과 상호 이해 가능성이 낮은, 비교적 고립된 언어권을 이룬다. 이 계통적 고립이 불편함이었지만 동시에 자립의 조건이었다.


영어권의 문화가 헐리우드의 중력에, 중남미 스페인어권의 콘텐츠가 멕시코의 거대 시장에 집중되는 동안, 우리는 우리말의 리듬과 감정의 결을 보존한 채 고유한 생태계를 길러왔다. 한류의 정서적 근원에는 바로 이 언어 생태가 있다.




가끔 나는 한국어가 참 귀찮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문법은 복잡하고, 존댓말은 까다롭고, 감정의 층위는 너무 많다. 그럼에도 이 언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귀찮음마저 감정의 세밀함으로 바꿔내는 언어, 한 문장 안에 온도와 향과 뉘앙스를 함께 담아내는 언어. 그게 바로 한국어다. 불편함이 미학이 되고, 과잉이 미세가 되는 드문 경우다.


한국말과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할 땐 영어가 편하지만, 친구들과 놀 땐 한국말이 훨씬 재밌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의 영어가 그 친구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영어로 말할 때는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을 느낀다. 한국말의 특성이 어떤 면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언어에 요구되는 엄밀함과 융통성이라는 이중적 요소 속에서, 한국어는 확실히 융통성에 더 큰 점수를 준다. 서구의 철학과 과학이 지금같이 세상을 지배하는 데에는 언어의 엄밀함이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한국어는 정의보다는 맥락, 논리보다는 결(結)에 의지하는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말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풍부함과 섬세함이 있다고 믿는다. 요즘 모두가 이야기하는 MBTI로 치면 극명한 T(Thinking) 성향에 가까운 나에게, 한국어는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감각의 문을 열어준다. 언어가 사고의 형태를 바꾼다는 말이 맞다면, 나는 그 증거일지도 모른다.


가끔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지금과 비슷한 기질을 지닌 채 영어 혹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삼았다면, 현재의 나와 얼마나 다른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면 훨씬 더 명료하고 효율적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나 책을 보며 느끼는 미묘한 감동은 희미해지고, 대신 지금보다 훨씬 더 차갑고 둔감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다지 애국자라 할 수는 없고, ‘한국인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한 탓에.) 그럼에도 내가 한국말을 쓰고, 한국말로 생각하고 상상한다는 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감정보다 이성에 끌리는 편이지만, 여러 경험 속에서 한국어로 하는 생각과 상상이 어우러질 때 감정의 해상도가 높아지고, 나와 세계를 더 섬세하게 인식하게 된다.


조지 레이코프의 말처럼, “언어는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도구”다. 한국어로 사고하는 우리는, 이 언어로 감정을 세밀히 구분하고 관계의 온도를 조율하며, 때로는 세상을 ‘귀찮아’하면서도 깊이 사랑한다. 그 모순과 유연함 속에서, 나는 매번 같은 결론에 닿는다.


한국말은 참,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