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나 인터넷을 보면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세계 속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커졌는지에 대한 찬사가 넘쳐난다. 스마트폰, BTS, K-드라마, ‘세계가 놀란 행정 속도’, ‘24시간 편의점 문화’, ‘정확하고 빠른 택배’. 그 모든 것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같은 인터넷 안에서는 전혀 다른 말도 넘친다. “헬조선.”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최저. 이 두 얼굴의 간극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세상 모든 나라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중에는 자전거를 타고 외국인 한 명 보이지 않는 오지와 시골길을 달리던 날들도 있었다. 거기서 느꼈던 것은 단순했다. 한국의 인프라는 정말 최고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행정 처리의 속도, 의료 시스템의 접근성, 도로의 정비 상태, 교통의 효율, 그리고 편의 시설들까지.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 나라에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다들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사람들의 느긋함, 따뜻한 날씨, 저렴한 물가, 여유로운 리듬 같은 것들. 하지만 결국 나는 한국의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서울 같은 인프라는 부족하지만, 시골이라 조용하고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웬만한 저개발 국가의 도시보다 훨씬 좋은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시스템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이상하리만큼 피곤하고 소진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발 떨어져 지내면 오히려 살기에 최고의 나라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한국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도 같은 말을 한다. 한국의 ‘빨리빨리’, 복잡한 사회 시스템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 속도로 살아가면 이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모든 장점들이, 어쩌면 우리를 너무 몰아붙인 결과가 아닐까? 모두가 저런 말을 하는 외국인이나 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이런 편의성과 인프라가 유지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다.
한 번은 미국의 유명 사진작가와 함께 한국의 곳곳을 다니며 촬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흔히 ‘천조국’이라 부르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 뜻밖의 장면에서 놀라움을 드러냈다. 바로 국도의 옹벽이었다. 산사태를 막기 위해 세워진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었지만, 그 표면에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선 무늬와 질감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데까지 디자인을 넣는다고?”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외국인의 시선에 들어온 그 작은 부분이 내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는 ‘보기좋게 만든다’는 사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보기 좋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기 좋음’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우리 사회는 정말 그렇게 부유한가? 모든 곳에, 심지어 그런 옹벽의 무늬 하나까지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있는가? 여전히 넘쳐나는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보기 좋은 것들’이 오히려 묘한 불편함을 남긴다. 마치 화려한 무늬로 덮인 콘크리트처럼, 우리 사회 역시 그 표면 아래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도시 곳곳에 놓인 공원, 무료 체육시설, 잘 닦인 도로. 이 나라는 분명히 살기 좋은 나라다. 하지만 동시에, OECD 국가 중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율은 GDP 대비 약 14.8%, 38개 회원국 중 34위라는 낮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수치인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복지 정책에 관한 뉴스에는 “세금만 축낸다”는 비난이 가득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손해 본다.” 그 말, 일정 부분은 이해된다. 하지만 어쩐지 섬뜩하다. 인프라가 좋은 사회 너머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더 쉽게 지워진다. 벽돌 하나하나가 반듯해지는 동안, 그 그림자에 가려진 존재들은 조금씩 우리의 의식에서 멀어졌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인프라’에는 관대하다. 모두가 사용하는 도로, 지하철, 공원, 교량에는 세금을 써도 된다고 쉽게 납득한다. 그건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사람들과 환경에 나가는 돈에는 인색하다. 거리의 노인, 복지시설의 아이, 장애인과 요양시설의 노동자, 혹은 그저 잠깐 멈춰선 사람들에게 향하는 세금은 언제나 논란이 된다. 그래서 정치인들과 행정기관은 ‘보기에 그럴듯한 것’에 더 많은 돈을 쓴다. 눈에 잘 띄고, 숫자로 성과를 내기 좋은 것들. 국도의 옹벽에까지 들어간 섬세한 디자인은 물론 보기 좋다. 그러나 그 예산이 조금 덜 정교한 벽으로 남고, 대신 더 힘든 사람들에게 향할 수 있다면—그건 더 가치 있는 선택이 아닐까. 물론 세상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단순한 질문이야말로 때로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된다.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렇게 말했다. “부란 단지 돈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다.” — [이 마지막 것에게 Unto This Last』, 1860.] 그의 말처럼 부와 세금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 쓰이느냐, 누구를 살리는가, 무엇을 남기는가의 문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부는 너무 눈에 띄는 곳에만 집중되어 있다. 편리함과 속도의 아름다움은 있지만, 느리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영역—가난, 돌봄, 실패, 회복 같은 것들—에는 시선이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의 실패를 감싸주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진짜 부유한 사회가 아닐까. 그러나 한국에서는 실패가 너무 비싸다.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오르기 어렵고, 그때 내미는 손보다 “스스로 책임지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도가 줄어들고, 도전은 평면화된다. 모두가 ‘안전한 길’만 찾는다. 결국 창의는 사라지고, 불안만 남는다.
자전거로 낯선 나라들의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묘하게도 비슷한 풍경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웃고 있었다. 전기도, 병원도, 깨끗한 수도도 없었지만, 그들의 웃음은 태양처럼 환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낯선 이방인인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단지 낙관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행복은 부의 양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본 아이들의 웃음은 형용하기 어려운 벅참을 주었다. 그 웃음에는 이유도, 계산도 없었다. 단지 오늘을 살아내는 힘이 있었다.
한국의 아이들은 다르다. 열 살만 넘어도 이미 어른의 표정을 짓는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어두워 보인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몰라야 할 나이에, 벌써 눈치와 경쟁의 법칙을 배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종종 피로와 불안을 감춘 채, 하루를 버티기 위한 얼굴처럼 보인다. 밝고 환한 웃음보다 씁쓸한 웃음, 비웃음, 혹은 마지못한 웃음이 더 익숙하다. 우리의 얼굴에는 무언가 묻어 있다 — 지쳐 있음, 불안, 혹은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
결국 세금을 어디에 쓰느냐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살기 좋다’고 믿는가의 문제와 같다. 보기에 좋은 것보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에 자원을 쓸 수 있다면. 도로의 옹벽이 조금 투박해도 괜찮다. 대신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 더 덜 외롭고, 삶이 조금 더 덜 불안해진다면 그게 진짜 잘사는 나라가 아닐까?
한국은 분명 잘 사는 나라다. 도시의 불빛은 밤에도 꺼지지 않고, 거리는 깨끗하며, 사람들은 늘 바쁘게 움직인다. 택배는 하루도 되기 전에 도착하며, 행정은 빠르고 정확하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웃음이 사라진 얼굴들이 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우울증과 번아웃에 시달리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달려왔지만, 정작 ‘잘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