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은 축복이 아니라 숙제가 되었다. 행복이 아닌 모든 게 불행처럼 느껴져서 불편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 혹은 언어 중에 최대의 거짓말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말은 어쩐지 삶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삶을 ‘행복/불행’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순간, 회색의 넓은 지대가 지워지고, 우리는 자신의 하루를 끊임없이 채점하기 시작한다. 마치 ‘오늘의 행복 점수’를 100점 만점으로 매기듯이.
그래서 나는 아예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쓴다. 농담처럼 종종 말한다. 아마 화장되어 어딘가 뿌려지겠지만 혹시라도 묘비를 만든다면 이렇게 새겨달라고.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있었다.”
그 ‘거짓말’의 배경엔 단어의 변신이 있다. 영어의 happiness는 ‘우연, 행운’을 뜻하는 hap에서 나왔다. happy는 본래 ‘lucky(운이 좋은)’에 가까웠고, 16세기경 happiness라는 명사가 굳어졌을 때도 의미의 중심은 “good fortune(좋은 운)”이었다. 다시 말해, 행복은 애초에 ‘계획표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운명보다 통계를 더 믿게 되었고, 결국 행복까지 ‘관리 가능 항목’에 포함시켰다. ‘오는 것’이던 행복이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쯤 되면 행복은 더 이상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와 캘린더 앱 속에서 꾸역꾸역 만들어야 하는 프로젝트가 된다. 마치 “오늘도 행복을 달성하세요!”라는 푸시 알림이 인생의 미션처럼 울려대는 시대다.
한자어 ‘행복(幸福)’의 여정도 닮았다. 幸은 ‘다행·요행’, 福은 ‘가득한 복’이다. 문자 결합 그대로 읽으면 “우연히 좋은 일이 생겨 복이 가득한 상태.” 그런데 요즘의 ‘행복’은 어쩐지 “꾸준한 자기관리의 결과”처럼 들린다. 마치 복(福)도 월 구독제로 운영되는 시대 같다. 동서양이 서로를 베낀 건 아니지만, 각자 내부의 어원을 지닌 채 사회의 패러다임 -자본주의, 통계, 산업- 속에서 ‘행복’을 상태·지표·목표로 재구성했다. 결국 모두가 ‘행복지수’라는 이름의 리포트를 받아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상태화’다. 상태는 관리·비교·측정을 부른다. 상태로서의 행복은 숫자, 캠페인, 소비로 포획된다. 행복이 ‘측정 가능한 목표’로 바뀌면서, 그것은 너무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얼마나 가지면 행복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올라야 만족할 수 있는가 - 행복은 점점 계산 가능한 표처럼 변해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현실의 언어로 옮겨진 행복은 정작 손에 잡히지 않는다. 행복은 마치 “현실적인데 실현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너무 가까워서 피로하고, 너무 멀어서 막연하다. 각자의 행복은 분명 다를 텐데,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어느새 만능의 목표처럼 떠돌며 모든 삶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어느 노래의 가사가 “행복하자”만 반복된다면, 그건 어쩐지 슬프고 괴로울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라고 하면 느낌은 달라진다.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 행복은 이미 가까워져 있는 것 같다. 어쩌면 행복은 그런 식으로, 아주 단순한 말 한 줄 사이에도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같은 행복이라도 어느 자리에, 어느 말 속에 들어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언제,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묻기보다 “행복하고 싶다”는 막연한 주문만이 남았다. 그 말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령처럼 세계를 떠돈다. 아마도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마케팅 문장’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행복’을 순간으로 이해하면 풍경이 달라진다. 순간은 붙잡을 수 없고, 그래서 표준화할 수 없다. 한 모금의 따뜻한 차, 비가 갠 오후의 공기, 늦은 밤 건네받은 짧은 위로처럼, 지나간 뒤에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 나는 그런 ‘행복의 순간’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리할 수 없고, 그래서 진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상태’는 언제나 어딘가 멀리 있지만, 행복한 ‘순간’은 이미 이 자리에서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만일 내가 죽음을 나의 삶 속으로 끌어와 인정하고 정면으로 바라본다면,죽음에 대한 불안과 삶의 하찮음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유한성의 자각은 ‘항구적 행복’이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순간의 빛을 키워준다. ‘영원히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리는 감각. 그래서 나는 ‘행복하라’는 구호보다 ‘깨어 있으라’는 말에 마음이 간다. 깨어 있음은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그 순간들이 쌓여 한 사람의 운명이 된다.
우리 존재가 애초에 기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행복 과제’는 더 우스워진다. 한 과학자가 계산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한 인간이 살아 있을 확률은 10분의 1의 2,685,000승이다. 그의 비유를 빌리면, 1조 개의 면을 지닌 주사위를 200만 명이 동시에 던져서 전부 같은 숫자가 나올 확률과 같다. 그만큼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다. (『편안함의 습격』-Michael Easter)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끝없이 스쳐가는 시간마다 우리는 기적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감사하기만 하자는 말은 어딘지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쩌다 한 번쯤이라도 떠올려 보면 놀랍지 않은가?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의미를 지닌 채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다. 통장 잔고를 보는 순간 그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게 터프한 현실 속에서도, 가끔은 이런 생각들로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게 핵심이다. 행복한 상태를 지속하는 게 아니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고대 그리스에서 ‘잘 산다’(εὐδαιμονία)는 덕의 활동이었지 감정의 고정 상태가 아니었다. 중세의 ‘복됨’은 신과의 합일이었고, 근대의 행복은 세속의 목표로 내려와 개인과 국가의 관리지표가 되었다. 현대 심리학은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으로 분해해 측정하지만, 그 측정 가능성이 바로 행복의 신비를 말소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행복한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스쳐가는 행복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예전에 친구 하나가 자기는 매주 일요일마다 로또를 한 장씩 산다고 했다. 왜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로또 1등 될 확률보다 일주일 동안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높거든.
그래서 토요일에 당첨이 안 된 걸 확인할 때마다 ‘안 죽고 살아남았다’는 걸 감사하려고.”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나는 그 대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행복 방식’을 찾은 셈이니까.
나도 가끔 로또를 산다. 물론 1등에 당첨되길 바라긴 하지만, 안 돼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 돈의 10원, 아니 1원이라도 누군가의 당첨 기쁨에 보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낙첨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게다가 로또 수익의 상당 부분이 공공사업에 쓰인다는 점까지 떠올리면, 이건 거의 ‘참여형 기부 이벤트’다. 어쩌면 한국식 공동체 돈관리 방식인 ‘계(契)’의 현대판쯤 될지도 모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계원이 너무 많아서 내가 돈을 받을 차례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어쩌면 아예 내 차례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클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돈으로 잠시나마 기쁨을 느낄 테니, 그 정도면 괜찮다.
나는 믿는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사건은 예고 없이 일어나고, 지나간 뒤에 흔적으로 남는다. 흔적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방향이 된다. ‘행복한 삶’이란 결국 ‘행복한 순간’을 충분히 허용한 삶이다. 돈이 많고 성공을 거둔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그게 자동으로 행복으로 환전되지는 않는다. 돈을 많이 벌어도 그 과정이 괴롭다면 잔고는 늘어도 마음은 마이너스일 뿐이다. 명예를 얻었으나 그것이 짐이 된다면, 그건 ‘불행을 포장한 성공’일 뿐이다.
집에 돌아오는 어느 가을의 길목에서 기분 좋은 바람을 느낄 때의 평온함,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다 느끼는 충만감, 읽던 책 속에서 문장 하나가 마음을 감싸주는 순간. 그것이면 족하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스쳐갔던 행복한 순간의 감각은 내 안 무의식의 어느 자리에 남는다. 행복은 언제나 틈으로 들어온다. 너무 꽉 채워진 삶에는 그 틈이 없다.
삶은 우리에게 숙제가 아니라 선물이다.
선물은 만들거나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매일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거짓말은 사라지고 진짜 삶이 드러난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의미가 없어도 된다. 그것이 기적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니 나는 처음의 농담으로 돌아간다.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있었다.”